“직장인 워라밸 챙기다 청년은 평생 놀 수도” 근로시간 단축의 역설
“직장인 워라밸 챙기다 청년은 평생 놀 수도” 근로시간 단축의 역설

주 40시간 근무제, 주 4.5일 근무제 등 직장인 근로시간이 지금보다 줄어들 경우 기업은 물론 기존 직장인들의 경력선호·신입외면 현상이 더욱 뚜렷해질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된다. 기업의 경우 근로시간이 줄어들면 업무효율을 찾게 될 수밖에 없고 자연스레 교육이 필요한 신입 보단 업무에 익숙한 경력을 찾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동료 직원들도 근로시간이 줄다 보니 별도의 교육·관리가 필요한 신입을 기피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경력선호·신입외면 현상의 심화는 그동안 근로시간 단축의 부작용으로 자주 언급돼 온 기업 생산성과 직장인 소득 감소 보다 그 심각성이 더욱 큰 것으로 평가됐다. 청년 실업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경력선호·신입외면 현상이 심화되면 결국 청년들의 취업 문턱은 결국 높아질 수밖에 없고 청년 실업과 관련된 노동 생산성 저하, 세대 갈등, 결혼·출산 기피와 출산율 하락 등의 부작용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근로시간 단축➞효율 선호 분위기 강화➞경력선호·신입외면 심화➞청년실업률 증가

 

최근 근로시간 단축을 목적으로 한 ‘주 4.5일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노동계는 삶의 질 제고 등을 위해 주 4.5일제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며 정부 역시 해당 이슈를 국정과제로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덕분에 지난 2004년 주 5일제가 시행된 지 21년 만에 노동시장의 중대한 변화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다만 여전히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경제계와 일부 전문가들은 생산성 하락과 인건비 부담, 대·중소기업 간 격차 확대 등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 서울 중구 금융산업노조상황실에서 열린 9.26 총파업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형선 전국금융산업노조 위원장. [사진=연합뉴스] 

 

특히 최근엔 기존에 없던 부작용 우려까지 등장해 이목이 쏠리고 있다. 주 4.5일제와 함께 등장한 정년연장 이슈의 부작용으로 지목돼 온 ‘청년 고용 위축’ 문제가 주 4.5일제의 부작용으로도 언급되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업무효율 제고, 이에 따른 경력선호·신입외면 현상 심화가 결국 청년 고용 위축을 불러올 것이라는 주장이다. 쉽게 말해, 일할 시간이 줄어드니 능숙한 사람을 선호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신입은 더욱 외면 받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미 주 4.5일제 도입 논의가 본격화된 시점에 맞춰 경력선호·신입외면 징후도 나타나고 있다. 채용 플랫폼 사람인이 371개 기업을 대상으로 ‘하반기 채용 계획’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경력직이 입사지원서를 낼 수 있는 곳은 90.8%에 달하는 반면 신입은 67.7% 밖에 되지 않았다. 올 상반기 채용 계획 조사 당시 경력을 뽑는 기업이 91.9%, 신입을 뽑는 기업이 83.6% 등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신입을 외면하는 기조가 강해진 셈이다.

 

주목되는 점은 기존 직장인들도 이미 신입 보단 경력을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경력직 채용 기조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갖춰져 있는 셈이다. 채용 플랫폼 잡플래닛이 직장인 57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대다수인 93.4%가 일반 신입보다 ‘중고 신입’ 후배를 더 선호한다고 답했다. ‘중고 신입’은 직장 경험이나 유관 업무 경험을 가진 신입 직원을 말한다. 사실상 경력직과 다름없지만 채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일부러 신입에 지원하는 것이다.

 

▲ 채용공고를 살펴 보는 청년들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중고 신입’ 후배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소통이 수월할 것 같아서(38.1%) ▲업무 스킬이 풍부할 것 같아서(28.8%) ▲눈치가 빠를 것 같아서(25.5%) 등 일의 능률이나 효율과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또한 직장인들은 스스로도 ‘중고 신입’ 이직을 고민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건이 좋다는 전제하에 중고 신입 지원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경력 기간은 ‘1~2년’이라는 응답이 41%로 가장 높았고 ‘3~4년’도 38.5%에 달했다. ‘경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답한 비율은 2.5%에 그쳤다.

 

“배우는 신입은 퇴근, 가르치는 선배는 야근” 경력직 선호 확고한 요즘 직장인들

 

르데스크가 만난 주요 기업 인사담당자들과 일반 직장인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대기업 계열사 인사부서 관계자는 “일하는 시간이 줄면 아무래도 회사 입장에선 동일 시간 대비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다”며 “신입은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줘야 하지만 경력직 직원은 이미 관련 업무에 능숙하고 경험이 많아 곧장 현장 투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의 인사 담당자도 “근무시간이 줄면 회사도, 기존 직원도 전부 경력만 찾을 것이다”며 “일하는 시간이 줄면 일을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일반 직장인들도 개인의 생산성과 성과 때문에라도 신입 보단 경력직 동료를 선호하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 대기업 계열사에 재직 중인 이유진 씨(34·여)는 “근무시간이 줄면 지금보다 더 바빠질텐데 신입을 가르치고 관리하는 일까지 어떻게 하나”라며 “일처리가 늦어지면 퇴근이 늦어질 텐데 결국 일을 배우던 신입은 퇴근하고 나만 남아서 일을 하는 상황이 올 것 아닌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직장인 김장윤 씨(41·남)는 “주변에 일 잘하는 동료가 많은 게 나한테도 유리하다”며 “근무시간이 줄면 능력자 동료가 더욱 절실할 것 같다”고 강조했다.

 

▲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신논현역 인근 직장가. ⓒ르데스크

 

전문가들 역시 전체 근로시간이 줄어들면 아무래도 경력선호·신입외면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청년 실업 문제에서 파생되는 노동 생산성 저하, 세대 갈등, 결혼·출산 기피와 출산율 하락 등과 같은 제2, 제3의 부작용 발생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근로시간 단축이 노동시장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검토해야 한다”며 “주 4.5일제가 시행되면 특히 기업들이 제한된 시간 안에 즉시 성과를 낼 수 있는 인력을 선호하게 되면서 신입이나 경력 초기 청년층의 진입 장벽이 높아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문제는 단순한 노동시장 변화가 아니라 교육, 복지, 인구구조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종합문제로 확산될 수 있는 만큼 정부 차원의 장기적이고 정교한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계수 세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재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노동 생산성이 다소 낮은 편인데 이는 실제 근무 시간에 비해 비생산적인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주 4.5일제까지 시행된다면 기업들은 자연스레 인력 효율화를 위해 경력직 채용을 늘리거나 AI 기술을 도입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신입사원이 진입할 수 있는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고 전망했다. 이어 “실제로 한국 IT 산업의 중심지인 판교의 평균 연령대가 이미 40대를 넘어섰다는 점은 청년층의 진입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며 “이처럼 겉보기에는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근로시간 단축이 오히려 청년층의 기회 감소와 노동시장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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