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가 연일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며 들뜬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장밋빛 전망에 가려진 리스크를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경고가 나온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잇따라 내놓은 관세 정책과 글로벌 무역환경 불확실성이 투자심리에 미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코스피가 3300선을 돌파하며 4년 만에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지만, 외국인 매수세에 기댄 단기 랠리가 장기적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100일을 맞아 ‘코스피 5000’ 의지를 밝힌 것도 증시에 긍정적 신호로 해석되지만 정치적 변수와 관세 충격이 겹치면 급락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3300 박스권 탈출’ 새 역사 쓴 코스피…증시 랠리 vs 불안한 고점
코스피는 10일 전장 대비 54.48포인트(1.67%) 오른 3,314.53으로 장을 마감하면서 2021년 7월 기록했던 3305.21을 넘어섰다. 장중에는 3317.77까지 치솟으며 4년여 만에 새로운 역사적 고점을 찍었다. 외국인과 기관의 동반 매수세가 지수를 끌어올린 가운데 이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대주주 양도세 부과 기준을 현행 50억원으로 유지하겠다고 밝혔고, 국민성장펀드 증액과 세제 개편 기대감이 맞물리며 투자심리를 자극한 결과로 분석된다.
업종별로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대형주가 랠리를 이끌었고 LG에너지솔루션·현대차·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시총 상위 종목들이 일제히 강세를 나타냈다. 코스닥 시장 역시 830선을 회복하며 동반 상승세를 보였다. 국내 자본시장 전반에 모처럼 ‘대축제’ 분위기가 퍼진 셈이다.
하지만 증시가 고공 행진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시장 내부에서는 경계감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외국인 매수세가 코스피 랠리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에서 글로벌 정책 변수와 환율 변동에 따라 언제든 방향성이 뒤집힐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실제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일보다 2.5원 오른 1389.1원에 거래를 시작해 외국인 자금 유입이 안정적으로 이어질지에 대한 의구심을 키웠다.
여기에 미국 뉴욕 증시가 혼조세로 마감한 것도 불안 요인이다. 다우지수는 하락했고 S&P500과 나스닥은 소폭 상승 마감하긴 했지만 급등락을 반복하는 등 글로벌 증시가 뚜렷한 방향성을 찾지 못하는 흐름을 보였다. 특히 오라클 실적 호조가 AI·반도체주를 끌어올렸지만 미국 8월 생산자물가지수(PPI)가 예상치를 밑돌면서 3분기 기업 실적 둔화 우려가 확산됐다.
대미 수출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도 증시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달 대미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2% 감소해 코로나19 위기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특히 자동차·부품 수출액은 각각 3.5%, 14.4% 감소하면서 관세 부담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관세 리스크에 글로벌 증시 흔들…日 관세 행정명령 발효, 韓은 감감무소식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반영되고 있다는 점도 국내 증시엔 여전한 악재로 지목된다. 국제금융센터(KCIF)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4월 상호관세 발표 직후 주요국 증시는 경기 침체 우려로 급락했으며, 이후 협상 지연과 완화 기대감으로 반등했지만 관세 민감 업종은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일본과 유럽 증시 모두 자동차·소비재·헬스케어 등 미국 의존도가 높은 업종은 실적 전망치가 큰 폭으로 하향 조정됐다. 일본 자동차 업종은 연초 대비 -16.4%, 유럽은 -24.2%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국내 자동차 업계에 위기감이 감돈다. 한국은 지난 7월 미국과 관세 인하에 합의했지만, 아직 구체적 행정명령으로 이어지지 않아 일시적으로 일본에 비해 불리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현대차·기아의 점유율은 10.8%에 그친 반면 도요타·혼다 등 일본계 브랜드는 37.1%에 달했다. 관세 리스크가 현실화될 경우 양국 자동차 업체 간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럽 증시 역시 관세 불확실성에 따른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다. 유럽 Stoxx600 지수의 12개월 선행 주당순이익(EPS)은 -1.5% 하락했다. 특히 소비재·서비스 업종의 전망치는 -6.7% 급감했다. 루이비통·로레알 등 명품 기업들의 미국 의존도가 높은 데다 고율 관세로 인한 가격 경쟁력 하락이 기업 실적에 직격타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박승민 국제금융센터 책임연구원은 “관세 노출이 큰 업종을 중심으로 밸류에이션 부담이 확대되고 있다”며 “현재의 증시 강세가 관세 리스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과열된 측면이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 일본 자동차 업종의 주가수익비율(P/E)은 연초 10배에서 13.7배로 급등했고, 유럽 산업재 업종의 밸류에이션도 19.6배에서 21.5배로 높아졌다. 실적은 꺾이는데 주가는 고평가되는 ‘버블’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흐름이 한국 증시에도 나타날 수 있는 만큼 묻지마 투자 열풍을 경계해야 한다는 경고가 증권업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에 깊이 연결돼 있는 한국의 산업 구조상 대미 수출 비중이 높은 자동차·반도체·배터리 업종은 관세 변수에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결국 한국 증시의 고점 랠리가 이어지기 위해선 결국 ‘정책 대응’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정부가 대미 협상에서 일본·유럽 수준의 관세 인하를 조속히 확보하고, 동시에 기업 차원에서도 공급망 다변화와 비용 구조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나정환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지금 코스피의 사상 최고 기록은 분명 의미 있는 이정표지만 투자자들이 이 흐름을 무조건적인 상승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며 “관세 리스크가 정점을 지났지만 미국발 변수가 시장 변동성을 키울 수 있는 만큼 앞으로도 경기지표나 이벤트에 국내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적 변수와 관세 충격이 겹치면 언제든 급락장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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