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체 기록 없애주니 또 연체…양심 차주 허탈감 키우는 금융포퓰리즘
연체 기록 없애주니 또 연체…양심 차주 허탈감 키우는 금융포퓰리즘

지난해 정부가 추진한 ‘신용사면’ 제도가 도입 취지와 달리 금융시장에 악순환을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주목된다. 지난해 신용사면 조치를 받은 국민 3명 중 1명이 제1·2금융권에서 새로운 대출을 받았지만 이후 다시 연체를 일으킨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반복적 연체 행위의 배경에 도덕적 해이가 자리하고 있다며 선진국처럼 일정 기간 성실 상환을 전제로 한 ‘점진적 신용회복 시스템’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쉬운 신용회복에 상습적 연체 행위 기승…미국·독일은 ‘점진적 신용회복 제도’ 시행

 

16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이양수 국민의힘 의원실이 NICE평가정보·한국평가데이터(KODATA) 등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5월 신용사면을 받은 286만7964명 중 95만5559명(33.3%)이 다시 연체자가 됐다. 이들은 신용사면을 받은 뒤인 지난해 6월부터 올해 7월까지 금융권에서 총 38조3249억원에 달하는 돈을 신규로 대출받았다. 올해 7월 말 기준 미상환 대출 규모는 1인당 평균 4283만원, 총 28조5160억원에 달한다. 빌린 돈의 73.7%가 아직도 상환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연체금 대부분은 1·2금융권에 집중됐다. 지난해 금융권별 신용회복 지원 수혜자 가운데 신규 대출을 받은 인원은 은행이 39만6612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카드(26만8866명) ▲저축은행(19만6500명) ▲캐피탈(14만7764명) ▲보험(12만4789명) 등의 순이었다. 신용사면으로 인한 신용등급이 상승하자 다시 1·2금융권에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것이다. 지난해 사면 직후 개인 평균 신용평점은 653점에서 684점으로 평균 31점, 개인사업자 평균 신용평점은 624점에서 725점으로 평균 101점 각각 상승했다. 

 

▲ 서울 시내 카드 대출 관련 광고물. [사진=연합뉴스]

 

윤석열정부 시절인 지난해 3월 시행된 신용사면제도는 2021년부터 2천만원 이하의 채무를 보유한 인원을 대상으로 지난해 5월까지 채무를 완전히 상환한 경우 연체 기록을 전면 말소해 준다는 내용이 골자다. 그러나 제도 시행 이후 연체기록이 말소된 이들이 높아진 신용점수를 바탕으로 새 대출을 받은 뒤 연체를 반복하면서 제도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출과 연체에 대한 부담감 해소가 도덕적 해이를 야기하는 것은 물론 성실 상환자의 상대적 박탈감 형성 및 금융시장 전반에 불안정성 가중을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금융권에서는 신용사면의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반복 연체자 증가로 인해 전체 가산금리가 상승하는 부작용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사면자들과 성실 상환자들을 구분할 수 없다 보니 이들의 연체는 1·2금융권의 일괄적 가산금리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 역시 현재의 일괄적 신용사면 방식 대신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운영 중인 점진적 신용회복 프로그램 도입으로 선회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미국은 대표 신용점수 모델인 FICO(Fair issac and Company)를 활용해 1·2금융권의 대출 가능 여부를 조절하고 있다. 이 점수는 미국 내 90% 이상의 금융기관이 대출 승인, 금리 결정, 한도 책정 등 여신 관련 부분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신용 평가 지표다. FICO 점수는 신용점수를 구성하는 5가지 요소로 산출되는데 이 중 연체 이력, 채무불이행 이력, 성실 납부 여부 등을 따지는 지급이력(Payment History)이 가장 큰 비중인 35%를 차지한다.

 

▲ 지난 12일 열린 금융안정감독위원회(FSOC) 회의 장면. [사진=조나단 굴드 미국 통화감독청장 개인 SNS]

 

미국에서는 과거 연체 이력이 7년 동안 신용보고서에 기록되며 이 기간 동안 국가가 연체 기록을 지우거나 신용점수를 임의로 회복시켜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연체 기록은 7년간 남아 개인의 신용점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연체 금액이 작거나 기간이 짧아도 예외는 없다. 다만 최초 연체 후 신용점수가 크게 하락했더라도 이후 성실 상환이 반복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연체 기록의 점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든다. 연체 이력이 있더라도 성실 상환을 통해 신용 점수를 점진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역시 연체 등 부정적 금융 이력을 일괄 삭제해주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를 상환하면 3년 후 채무 기록은 삭제되지만 연체 이력이 있다면 ‘과거 이력 있음’으로 시스템에 남아 신용점수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이를 통해 금융기관은 대출 가능 여부와 규모를 결정한다. 다만 과거 연체 이력이 있더라도 이후 성실 상환이 이어지고 추가 연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신용점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상승한다. 채무자의 실질적 신용 회복은 성실 상환과 시간 경과를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연체 기록을 제도적으로 삭제하거나 신용점수를 즉시 회복시키는 방식은 채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양수 국민의힘 의원은 “무분별한 신용사면은 성실상환자의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고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며 “정부는 포퓰리즘식 사면을 지양하고 재기 의지를 가진 사람을 선별해 구제하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재와 같은 일괄적 신용사면 방식은 장기적으로 도덕적 해이와 금융질서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며 “선진국처럼 채무자의 성실한 상환 이력과 행동 변화를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신용을 회복할 수 있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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