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림그룹 김홍국 회장의 네 자녀 가운데 그룹 경영의 중책을 맡은 장녀와 장남의 운명이 엇갈리고 있다. 장녀는 일찌감치 그룹의 ‘미래 먹거리’ 사업을 주도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반면 아들은 지배력 승계를 마치고 차기 총수로서의 존재감 확보를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한 상태다. 하림그룹 안팎에서는 아직까지 장남의 경영 능력 또한 확실히 입증되지 않은 만큼 김 회장 이후를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실적도 존재감도 있는 듯 없는 듯…하림그룹 ‘계륵’ 전락한 김주영의 야심작 ‘더 미식’
재계 등에 따르면 현재 김 회장은 슬하에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장녀 김주영 하림지주 상무(1988년생)를 비롯해 장남 김준영 팬오션 투자기획팀 책임(1992년생), 차녀 김현영 씨(1995년생), 삼녀 김지영 씨(1999년생) 등이다. 현재 이들 모두 하림지주 및 주요 계열사에 몸담고 있다. 이들 중 장녀 김 상무과 장남 김 책임은 각각 지주와 각 계열사에서 전략·기획 분야의 중책을 맡고 있다. 반면 김현영·김지영 씨는 신사업 개발과 플랫폼 기반 사업 분야의 경력을 쌓아 나가고 있다.
그러나 전략·기획의 중책을 맡은 장녀와 장남의 경우 아직까지 이렇다 할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이다. 특히 그들이 사업 추진 단계부터 시행까지 깊숙이 개입한 신사업의 부진이 심화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일례로 김 상무가 제품 기획부터 출시까지 전 과정을 진두지휘해 2021년 출시한 간편식 브랜드 ‘더 미식’의 경우 출시 초기만 해도 김 회장의 종합식품기업 도약 비전을 실현해 줄 발판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현재는 하림의 재무 부담만 키우는 ‘애물단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앞서 하림그룹은 ‘더 미식’ 브랜드를 연 매출 1조5000억원 규모의 그룹 핵심 사업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제시하며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지난 2020년 전북 익산에 5200억원을 들여 ‘하림 퍼스트 키친’ 공장단지를 조성한 게 대표적 사례다. 브랜드 출시 4년여가 흐른 현재 지난해 ‘더 미식’의 연간 매출은 802억원으로 여전히 목표치의 5%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또 주력 제품인 라면의 경우 경쟁업체에 밀려 존재감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닐슨IQ코리아 등 시장조사업체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라면 시장에서 농심(56%), 오뚜기(23%), 삼양식품(11%), 팔도(9%) 등 경쟁업체 점유율은 무려 99%에 달했다.
식품업계 등에 따르면 김 상무가 주도한 ‘더 미식’이 고전하는 결정적 이유는 가격 경쟁력 때문이다. 가정간편식(HMR) 시장에서 후발주자인 ‘더 미식’은 기존 시장을 선점한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위해 ‘프리미엄 전략’을 택했지만 ‘간편하고 저렴함’이 강점인 간편식과 프리미엄 개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다. 실제로 대표 제품인 ‘장인라면’은 2021년 출시 당시 편의점 기준 1봉지 당 2200원의 가격이 책정됐다. 농심 ‘신라면’(1000원)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이다. 즉석밥 제품인 ‘더 미식 백미밥’(210g) 역시 개당 2300원으로 CJ제일제당의 ‘햇반’(210g·2100원)보다 가격이 높게 책정됐다.
김 상무는 하림펫푸드 사내이사와 엑셀로이콰인알앤디센터 이사직도 맡고 있다. 두 기업 역시 하림그룹이 미래 먹거리로 지목한 신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하림펫푸드는 반려동물 식품 시장 진출을 위해 제일사료의 애견사료 부문을 물적 분할해 출범시킨 계열사다. 엑셀로이콰인알앤디센터는 스포츠 승마 전문 기업으로 승마 프로그램 운영, 승마용품 판매, 말 사료 제조 및 판매 사업 등을 영위하고 있다. 이들 두 기업도 아직까지 실적 측면에서 ‘미래 먹거리’로 불릴만한 수준엔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하림펫푸드의 경우 지난해 당기순이익이 전년(18억원) 대비 14억원 가량 증가한 32억원을 기록하긴 했지만 그룹 전체 실적과 비교하면 미비한 수준에 그쳤다. 엑셀로이콰인알앤디센터는 2023년 7억9800만원, 지난해 6억9800만원 등의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경영승계 목적 쓸모 다했나” 지배구조 정점 후계기업 실적 하락에 커지는 의구심
현재 하림그룹 승계 1순위로 거론되는 장남 김준영 책임은 2018년 하림지주에 입사한 후 2021년 JKL파트너스로 자리를 옮겼다가 올해 초 팬오션 책임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책임은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닭고기 가공회사 올품을 통해 하림지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김 책임은 올품의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으며 올품은 하림지주 지분 5.78%을 보유하고 있다. 또 올품의 100% 자회사인 한국바이오텍, 에코캐피탈 등도 하림지주 지분을 각각 16.69%, 0.24% 가지고 있다. 올품과 자회사들이 소유한 전체 지주회사 지분(22.71%)은 김 회장의 하림지주 지분(21.1%)을 상회하는 수준이다.
하림그룹 경영승계의 지렛대 역할을 한 올품과 자회사들은 최근 들어 매년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올품의 순이익은 ▲2022년(385억원) ▲2023년(203억원) ▲2024년(40억원) 등 불과 3년 사이 90% 가량 급감했다. 자회사인 한국바이오텍과 에코캐피탈 역시 지난해 순이익이 각각 전년 대비 약 38%, 22% 줄어들었다. 일각에선 “사실상 실질적인 사업 보단 경영승계 목적으로 설립됐고, 최근의 실적 부진은 그 쓸모를 다하고 버려졌다는 증거 아니냐”는 의혹의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올해 김 책임의 팬오션 이동은 이러한 의혹을 부채질하고 있다. 지배력 이전 다음 수순인 후계자 명분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하림지주 고위 임원에 따르면 이미 올해 초부터 그룹 내부에선 김 책임의 팬오션 이동을 두고 캐시카우인 팬오션에서 경영성과를 내게 함으로써 승계 명분을 쌓으려는 것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뤘다. 지난해 팬오션의 매출액은 5조1612억원에 달했다. 하림지주의 전체 매출액(12조2700억원)의 40%가 넘는 수준이다. 같은 기간 팬오션의 영업이익도 하림지주(7726억원)의 전체 영업이익의 60% 수준인 4712억원을 기록했다.
김 책임이 몸담은 이후 팬오션의 움직임도 분주해지고 있다. 지난 6월 베트남 최대 곡물 수입업체인 ‘카이안’(Kaian)과 미국산 사료용 곡물 수출 확대 업무협약을 맺으며 글로벌 시장 공략에 고삐를 죄었다. 팬오션은 곡물 트레이딩 사업 외에도 국내 대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친환경 선박 사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6월에는 HD현대중공업과 친환경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2척에 대한 신규 발주 계약을 체결했다. 해당 선박은 차세대 친환경 대체 연료인 LNG 및 암모니아 연료로 작동가능하다. 당시 체결식에는 김 책임이 직접 참여하며 재계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시점 확인 후 내용 수정 완료)
김 책임은 현재 팬오션 뿐 아니라 유통 자회사 NS쇼핑과 글라이드 사내이사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NS쇼핑은 하림 계열 홈쇼핑 회사로 지난 5월 CJ대한통운과 협력해 주 7일 배송 서비스 ‘매일 오네(O-NE)를 도입하며 고객 모집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다만 동종업계 안팎에서는 이미 쿠팡, 마켓컬리, 오아시스마켓 등 주요 이커머스 기업과 더불어 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 등 대형 오프라인 유통업체들까지 가세한 온라인 물류·유통 시장에서 ‘매일 오네’가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라는 평가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김 회장의 장남과 장녀는 모두 미국 유학파 출신으로 알려졌다. 장녀인 김 상무는 미국 에모리대학교와 시카고대학교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한 뒤 외국계 기업 IBM에서 근무하다 하림그룹에 합류했다. 장남 김 책임 역시 에모리대학교에서 마케팅 및 재무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은 후 같은 학교 비즈니스스쿨을 졸업했다. 남매가 모두 졸업한 에모리대학교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위치한 사립 연구중심 대학이다. 코카콜라 전 회장 로버트 우드어프와 전 CEO 로버트 고이주에타, 버거킹 전 CEO 존 치제이, 임태섭 전 골드만삭스 한국대표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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