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임죄 폐지, 기업 숨통 틔웠다…이젠 ‘보완입법’ 골든타임
배임죄 폐지, 기업 숨통 틔웠다…이젠 ‘보완입법’ 골든타임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형법상 배임죄를 전면 폐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70여년간 이어져왔던 제도의 폐지를 두고 찬반 여론이 불거지고 있다. 배임죄 폐지가 경영 위축을 해소해 기업 활력을 높일 수 있단 반응과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를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반응으로 나뉘고 있다.

 

재계 및 전문가들 사이에선 배임죄 자체의 존치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폐지 이후 어떤 보완 장치를 마련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배임죄에 대한 형사 처벌을 줄이는 대신 민사적·행정적 규율과 견제 장치로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글로벌 스탠다드 동 떨어졌던 한국형 배임죄…과잉처벌 논란 현재진행형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에 위배해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고 본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를 처벌하는 범죄다. 그러나 ‘임무 위배’라는 개념이 추상적이어서 어떤 행위는 처벌받고 어떤 행위는 허용되는지 경계가 모호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실제 2014년부터 2023년까지 법원 통계를 보면 배임죄 무죄율은 6.7%에 달해 전체 형사범죄 무죄율(3.2%)보다 두 배 이상 높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재판부마다 심급마다 결론이 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어떤 의사결정이 범죄가 될지 사전에 예측하기 어렵고, 이 때문에 과감한 투자를 꺼리게 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처럼 배임죄를 적용하는 걸 보기 힘들다는 점도 폐지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배임죄 폐지 추진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정상화라는 게 경제단체들의 주장이다. ⓒ르데스크

 

재계는 배임죄가 정상적인 경영 판단까지 형사 범죄로 몰아간다며 폐지를 꾸준히 요구해 왔다. 특히 합병·투자·구조조정과 같은 의사결정에서 손실이 발생하면 사후적으로 배임 혐의가 제기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경영진을 보수적으로 만들었다는 하소연이 끊이지 않았다. 기업들이 혁신보다는 ‘안전한 선택’만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처럼 배임죄를 적용하는 걸 보기 힘들다는 점도 폐지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에는 아예 배임죄라는 범죄가 없다. 경영 실패나 충실의무 위반은 민사소송으로 해결하고, 명백한 사기나 횡령만 형사처벌한다.

 

독일은 2005년 ‘경영판단의 원칙’을 법제화해 합리적 의사결정은 형사책임에서 면책되도록 했다. 일본도 배임죄를 두고 있지만 ‘본인에게 손해를 가할 목적’이 있어야 성립하는 등 훨씬 엄격하다. 반면 한국은 형법·상법·특경가법으로 배임죄를 3중 규제하고 있다. 이득액이 50억 원 이상이면 5년 이상 징역 또는 무기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이는 살인죄에 준하는 중형으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과잉 처벌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배임죄 폐지 추진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정상화라는 게 경제시민단체들의 주장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배임죄는 기업 의사결정 과정에 불확실성을 키우고, 결과적으로 혁신과 투자를 가로막는다”고 주장한다. 한국경제인협회 역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과중 처벌”이라며 배임죄 폐지를 환영했다.

 

여기에 최근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되면서 배임죄 적용 범위가 더 넓어질 우려가 커진 것도 폐지론을 밀어붙이는 배경이 됐다.

 

‘재벌 봐주기’ 비판 들불…사익편취 견제장치 마련 필수

 

배임죄 폐지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배임죄는 지금까지 총수 일가의 일감 몰아주기, 부당 합병, 부실 계열사 지원 등 사익편취 행위를 처벌하는 최소한의 방파제 역할을 해왔단 이유에서다. 이를 아예 없애면 민사나 행정 제재로는 속도나 강도 면에서 제어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소수주주는 내부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워 민사소송으로 총수 일가를 견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게 주요 시민단체들의 지적이다. 배임죄 폐지는 곧 지배주주 면죄부라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 배임죄 폐지 이후 구체적인 보완 입법 마련이 필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보완입법이 실패할 경우 배임죄 폐지는 “기업 살리기”가 아니라 “재벌 봐주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르데스크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문가들 사이에선 배임죄 폐지 이후 구체적인 보완 입법 마련이 필수라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징벌적 손해배상, 과징금, 집단소송 확대 등을 통해 처벌 공백을 메우겠다고 약속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설계안은 나오지 않았다. 보완입법이 실패할 경우 배임죄 폐지는 “기업 살리기”가 아니라 “재벌 봐주기”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도입돼야 할 견제 장치로는 이해상충이 개입된 거래에 대한 절차적 통제 강화가 지목된다. 특수관계인 거래나 계열사 지원은 사외이사 전원 참여 위원회 심의, 외부평가, 의무 공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사외이사가 독립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겸직 제한, 임기 교차제, 선임 절차 투명화를 법으로 보장하는 방안 마련도 거론된다.

 

소액주주 보호 장치 마련도 필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주주제안권·주주총회 전 전자투표·전자위임장 활성화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문턱을 낮추고, 주식매수청구권의 행사 범위와 가격 산정의 공정성을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증거개시제도를 도입해 내부 자료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고, 집단소송 제도의 적용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설명이다.

 

법인뿐 아니라 책임의 ‘개인화’도 거론됐다. 회사 차원의 과징금만으로는 실효성이 낮은 만큼 경영진 개인에게 보수 환수·직무정지·자격제한을 부과하는 제도가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내부통제 의무를 법정화하고, 중대한 위반 시에는 임원 선임 제한 같은 실질적 제재까지 가능하도록 해야한다는 설명이다.

 

결국 배임죄 폐지의 성패는 형사처벌의 공백을 메울 장치가 얼마나 촘촘하게 설계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영진에게는 혁신과 도전의 자유를 시장과 소수주주에게는 견제와 구제의 권리를 동시에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배임죄 폐지는 경제 활력을 살리는 게 아니라 재벌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사각지대를 용인하는 결과만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다.

 

홍기용 인천대 교수는 “배임죄 폐지는 기업인들에게는 숨통을 틔워줄 개혁일 수 있지만 동시에 시장 신뢰와 소수주주 보호라는 과제도 안겨준다”며 “민사·행정 제재와 내부 견제 시스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다듬는다면 한국 경제는 ‘규제 완화’와 ‘책임 강화’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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