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6월 3일에 치러지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이하 6·3지방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 사이에서 ‘반(反)엘리트’ 여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12·3비상계엄 사태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윤석열 전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이 내세운 이른바 ‘계몽령’ 논리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현실을 알리고 국민을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는 논리 자체가 “엘리트 특유의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반응이다. ‘계몽령’ 주장의 여파는 고소득·고학력자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쳐 6·3지방선거에서도 상당한 변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尹 내란우두머리 최후진술에도 ‘계몽령’ 주장…국민 여론은 “권위 의식에 찌든 발상”
윤 전 대통령은 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지귀연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내란우두머리 혐의 결심공판에서 무려 90분에 걸쳐 최후진술을 했다. 그는 혐의의 쟁점인 비상계엄 선포의 정당성·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핵심 내용은 내란이 아닌 계몽 차원이었다는 것이었다. 윤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국가비상사태를 국민에게 알리고 이를 극복하는 데 나서주십사 호소하고자 계엄을 선포했다”며 그동안 줄기차게 부르짖던 ‘계몽령’ 주장을 되풀이했다.
“국민을 깨우기 위한 경고용·호소용 비상계엄”이라는 의미의 ‘계몽령’은 윤 전 대통령과 극우 세력들이 내란 혐의를 부정하기 위해 꺼내든 단어다. 지난해 초 윤 전 대통령 탄핵심판 변호인단이었던 김계리 변호사가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변론에서 “저는 계몽됐습니다”고 언급해 극우 지지층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했다. 윤 전 대통령도 결심 공판 최후진술에서 “국민과 청년들은 계엄령이 계몽령이 됐음을 안다”며 극우 지지층의 표현을 스스럼없이 사용했다. 단어 자체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의 반응은 180도 다른 모습이다. ‘계몽령’이란 단어 자체에 상당한 반감을 가진 여론이 주를 이루고 있다. ‘계몽(啓蒙)’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 자체가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이라는 점에서 “국민 전체를 얕보는, 또는 국민 전체를 바보 취급하며 무시하는 행태”라는 반발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대학생 김선호 씨(24·남)는 “중세 계급사회에서나 쓰던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행태에 화가 치민다”며 “결국 자신들은 전부 알고 국민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평소 인식을 드러낸 것 아니냐”라고 일갈했다.
가정주부 황은지 씨(38·여)는 “정치를 못해서, 국정 운영을 못해서 결국 총선 선거에서 졌으면서도 남 탓을 하기 바쁘고 심지어 국민 전체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취급하는 사람이 대통령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황당하다”며 “그런 사람을 지지하고 심지어 ‘계몽’이 됐다며 스스로 바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놀랍기만 하다”고 말했다. 자영업자 김영훈 씨(31·남)는 “처음 ‘계몽령’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며 “일반적인 권위 의식으론 도저히 내뱉을 수 없는 단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계몽령’ 파장에 반(反)엘리트 여론 확산…6·3지방선거 고소득·전문직 후보 불똥 가능성
‘계몽령’ 주장의 여파는 상당한 후폭풍도 낳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계몽’이란 단어의 등장 배경에 엘리트 특유의 권위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리면서 고학력·고소득자 엘리트 정치인에 대한 반감이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다. 특히 앞으로 윤 전 대통령 내란우두머리 혐의 1심 판결, 극우 지지층의 대규모 집회 등 ‘계몽령’을 상기시킬만한 사안들이 줄줄이 예고돼 있는 만큼 엘리트 정치인에 대한 반감 여론이 6·3지방선거의 변수가 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직장인 이윤성 씨(35·남·가명)는 “윤석열 같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되고 실제로 당선까지 된 것을 보면 한국 정치는 ‘엘리트주의’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것 같다”며 “실제로 국회의원이나 정당 주요 당직자들만 봐도 교수, 법조인 등 소위 말해서 ‘배운 사람들’ 밖에 없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어려서부터 수재 소리를 들으며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평범한 국민의 생각을 얼마나 이해할지 의문이다”며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제2, 제3의 윤석열이 등장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고 부연했다.
직장인 홍주환 씨(53·남·가명)는 “주변에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종종 있다”며 “실패 경험이 적고 부족함 없이 살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옳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보는데 지금 우리나라 정치인 중 상당수도 그런 사람들이라고 본다”고 꼬집었다. 이어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 대학을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평범한 국민을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하겠나”라며 “우리나라 정치도 그런 엘리트 인물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반(反)엘리트 정서 확산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닌 것으로 조사됐다. 다른 나라에서도 재력이나 가문, 학벌, 나이 등을 앞세운 ‘엘리트 정치인’이 아닌 경제적·정치적으로 열악한 환경을 딛고 성공한 정치인을 선호하는 현상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 2024년 7월 치러진 프랑스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대표 조르당 바르델라 RN 대표는 마약상이 들끓는 파리 변두리 빈민촌의 미혼모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밝혀 프랑스 유권자의 높은 지지를 얻었다. 당시 현지 언론들은 “실패한 ‘엘리트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발을 읽은 결과”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비슷한 시기 14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룬 영국 노동당 정부 역시 이른바 ‘흙수저’ 출신들로 내각을 구성해 영국은 물론 전 세계의 조명을 받았다.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어 신임 총리에 오른 키어 스타머 총리는 공장 기술자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에서 태어난 인물이고 앤절라 레이너 2인자인 부총리 역시 빈민 가정 출신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해 치러진 대선에서 소년공 출신인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으로 사회 전반에 반(反)엘리트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세계 각국에서 동시다발 적으로 ‘반(反)엘리트’ 정서가 확산되고 있는데 대해 엘리트 중심 정치의 심각한 부작용 체감에 따른 학습효과의 발현이라고 진단했다. 앞서 피터 터친 옥스퍼드대 인류학과 연구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종말(End Time)’을 통해 “현대사회의 고학력자 급증으로 권력을 갖고자 하는 ‘엘리트 지망자’는 늘어나는데 자리는 한정돼 있다 보니 좌절한 엘리트 지망자들이 반(反)엘리트 세력이 된다”며 “여기에 기존 엘리트주의가 낳은 빈부 양극화로 궁핍해진 대중의 불만이 더해져 ‘반(反)엘리트’가 대세로 자리매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진단했다.
국내 전문가들 중 일부는 윤석열 전 대통령과 극우 지지층의 ‘계몽령’이 촉발시킨 ‘반(反)엘리트’ 정서가 오는 6·3지방선거에서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내놓았다. 고학력 전문직 후보에 대한 반감 정서의 등장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박정훈 서강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엘리트 주의 자체가 무조건 나쁜건 아니지만 세계 정치적 흐름에서도 최근 반(反)엘리트 정서가 확산하고 있는 상황이다”며 “재판부가 이미 12·3 비상계엄 사태를 내란이라고 정의한 상황에서 윤 전 대통령의 계몽령 논리는 오히려 반(反)엘리트 정서를 자극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의힘이 확실하게 윤 대통령과의 관계를 재설정하지 않으면 지방선거에서도 악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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