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원유 물동량의 20%를 담당하는 호르무즈 해협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해협 우회로를 확보한 글로벌 에너지 기업과 그곳의 수장들이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석유를 100%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들 입장에선 호르무즈 루트를 대신할 새로운 수급 루트 발굴에 국가 경제의 명운이 달린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 2023년 기준 한국의 전체 원유 수입 중 중동 비중은 71.9%였다. 호르무즈의 대체 루트를 발굴하지 못할 경우 원유를 원료로 하는 산업 전체가 ‘패닉’에 빠지게 된다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다.
호르무즈 대체 루트 확보한 중동 에너지 공룡들…수장은 사우디 왕세자·UAE 대통령 복심
이란과 오만 사이에 위치한 호르무즈 해협은 중동 산유국들과 세계 각국을 잇는 핵심 해상 통로다. 전 세계 해상 원유 교역량의 약 34%, 액화천연가스(LNG) 교역량의 약 20%가 이곳을 통과한다. 한국 역시 지난해 기준 원유 수입량의 7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중 95%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중동전쟁 발발 이후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선언하며 노골적인 ‘에너지 인질극’을 벌이면서 우회 항로의 가치가 급격하게 커지고 있다.
덕분에 전 세계의 관심이 호르무즈와 전혀 관련이 없거나 우회 항로를 확보한 원유 수출국 또는 수출 기업으로 향하고 있다. 호르무즈 봉쇄 반사이익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기업으론 가장 먼저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기업 아람코(Aramco)가 지목된다. 아람코는 사우디 동부 유전지대에서 홍해 연안 얀부(Yanbu) 항구까지 약 1200km를 가로지르는 ‘동서 파이프라인(East-West Pipeline)’을 갖추고 있다. 최근엔 홍해의 명목 구간 확장을 통해 일일 수송량을 700만 배럴까지 끌어올렸다. 사우디 전체 일일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지 않고 세계 각국으로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아람코는 석유 사업과 관련된 독보적인 기술력과 방대한 공급망을 갖춘 세계 최대 규모의 석유 기업이다. 싱가포르 데이터 분석 기업 그레이비(GreyB)에 따르면 아람코의 보유 특허는 약 1만7000건에 달한다. 특히 심사가 까다로운 미국 특허청(USPTO)으로부터 2022년부터 매년 1000건 이상의 특허를 획득하며 기술적 우위를 입증하고 있다. 이들의 특허 포트폴리오는 ▲유전 채굴 ▲고부가 석유화학 제품 ▲미래 에너지 생산 등 세 분야가 핵심 축으로 구성돼 있다.
아람코의 압도적인 위상은 실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2024년 기준 연간 매출 약 4804억달러(한화 약 640조 원), 순이익 약 1062억달러(한화 약 140조원)를 기록하며 글로벌 에너지 업계 부동의 1위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시장지배력 역시 확보한 편이다. 아람코의 일일 평균 원유 생산량은 약 1240만 배럴에 달한다.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의 10%에 가까운 수치이다. 아람코는 오는 2026년까지 최대 지속 생산 능력을 1300만 배럴로 확대해 시장 지배력을 공고히 한다는 계획이다.
아람코의 먹거리는 아시아 시장이다. 전체 수출량의 70% 이상이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등 아시아 주요국에 집중돼 있으며 각국 기업들과도 공고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있다. 일례로 아람코의 자회사 AOC(Aramco Overseas Company)는 현재 우리나라 에너지 기업 에쓰오일(S-OIL)의 지분 63.4%를 보유하며 최대주주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또 각종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도 국내 기업과 접점을 늘리고 있다. 현대건설과 삼성E&A 등에 자프라·파드힐리 가스전 등 수조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맡겼고 HD현대와는 암모니아 운반선 개발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람코는 사우디 국영기업인 만큼 철저히 사우디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다. 지배구조 역시 사우디 정부 81%, 국부펀드(PIF) 16% 등으로 구성돼 있다. 현지 증시인 타다울(Tadawul)에 상장된 공모 지분은 2.5% 수준에 불과하다. 아람코 수장 역시 사우디 최고 권력자로 평가되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최측근이 맡고 있다. 야시르 알루마얀(Yasir Al-Rumayyan) 회장은 빈 살만 왕세자가 2016년 왕위 계승 서열 1위 등극과 동시에 발표한 ‘사우디 비전 2030’의 경제 전략 사령탑을 맡은 이력을 지녔다. 과거 사우디를 순방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왕세자 다음으로 접견한 인사가 바로 알루마얀 회장이었다. 알루마얀 회장은 사우디 국립 파이살대와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거쳐 시중은행에서 경력을 시작한 뒤 투자은행 ‘프란시 캐피탈’ 대표를 역임한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2017년 아람코 이사회 의장에 오른 뒤 2019년 아람코의 기업공개(IPO) 실무를 총괄했다.
아랍에미리트(UAE)의 ‘아부다비국영석유공사(ADNOC)’ 역시 호르무즈 봉쇄에 대한 대비책을 갖춘 기업으로 평가된다. ADNOC는 아부다비 유전지대와 오만만의 푸자이라(Fujairah) 항구를 잇는 370km 길이의 ‘하브샨-푸자이라(Habshan-Fujairah) 파이프라인’을 운영해 왔다. 이 파이프라인을 통해 하루 최대 150만 배럴의 원유를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지 않고 인도양으로 직접 수송할 수 있다. ADNOC는 푸자이라 항구 내에 대규모 비축 기지와 선적 설비도 갖추고 있다.
ADNOC에 따르면 일평균 원유 생산량은 400만 배럴이며 2027년까지 500만 배럴로 확대할 계획이다. UAE 전체 원유 생산의 약 95%, 전 세계 공급량의 4~5% 수준이다. 최근에는 미래 먹거리 발굴의 일환으로 미래 에너지 경쟁력 강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탄소 포집 및 저장(CCS) 분야와 블루 암모니아 생산 공정에선 이미 세계적인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블루 암모니아는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제거한 청정 연료다. 이밖에 해수를 이용한 유전 회수 증진(EOR) 기술 관련 특허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중동의 고질적인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채굴 효율을 극대화하는 혁신적 솔루션으로 평가되고 있다.
ADNOC 역시 매년 견조한 실적을 유지하고 있다. 2024년 기준 주요 상장 계열사들의 합산 매출은 약 497억달러(한화 약 70조원), 순이익은 약 90억달러(한화 약 13조원)로 각각 집계됐다. 주요 고객사는 아람코와 마찬가지로 에너지 자립도가 낮은 아시아 국가들이다. 수출 물량 대부분이 한국, 일본, 중국, 인도로 향하며 특히 한국과는 유전 지분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긴밀한 ‘에너지 동맹’을 구축하고 있다. UAE 할리바(Haliba) 유전의 경우 ADNOC가 60%, 한국 컨소시엄(한국석유공사 30%, GS에너지 10%)이 40%의 지분을 각각 보유 중이다. 최근에는 한국가스공사, SK E&S 등 국내 주요 기업들과 청정 수소 및 블루 암모니아 공급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며 미래 에너지 파트너십도 구축했다.
ADNOC는 아부다비 정부가 지분 100%를 가지고 있다. ADNOC는 기업공개 대신 핵심 자회사를 선별적으로 상장시키는 자본 확충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경영적 판단을 주도하는 인물은 술탄 알 자베르(Sultan Al Jaber) 회장이다. 그는 UAE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 UAE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현재 대통령이 직접 설립한 AI 특화 대학인 ‘모하메드 빈 자이드 인공지능 대학교(MBZUAI)’ 이사장도 겸직하고 있다. 알 자베르 회장은 석유공학 전공자가 주류인 중동 에너지 업계에서 보기 드물게 경제학을 전공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CSLA)에서 MBA를 마친 뒤 영국 샐포드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덕분에 UAE 현지에선 전통적 에너지 자원과 첨단 기술, 경제 전략을 아우르는 탁월한 능력 갖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일찌감치 생산·운송루트 다변화 시도한 ‘영국의 쉘’, 육상루트 뚫어 놓은 ‘중국 CNPC’
호르무즈 해협과 동 떨어진 글로벌 석유 기업들도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곳은 영국의 에너지 거물 ‘쉘(Shell)’이다. 영국은 본래 자원 빈국이었으나 북해 유전을 개척하며 세계적인 석유 생산국으로 거듭났다. 2000년대 초반엔 일 평균 약 44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며 당시 이라크에 필적하는 순수출국으로 평가 받기도 했다. 자원 고갈로 현재 생산량은 일평균 100만 배럴 수준으로 감소했으나 쉘은 과거 북해 유전 개발을 통해 구축한 독보적인 해상 시추 기술을 앞세워 전 세계 심해 유전을 발굴해 과거에 못지않은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쉘이 가장 공들인 분야는 운송경로의 다변화였다. 쉘은 싱가포르와 로테르담 등 글로벌 주요 물류 거점에 대규모 저유 시설을 운용하며 지정학적 위기 시 특정 루트 의존도를 낮추는 유연한 물류 전략을 확보했다. 일례로 과거 자사 유조선과 LNG 운반선의 항로를 아프리카 희망봉으로 전환하는 공급망 재편을 단행한 바 있다. 희망봉 우회 시 항해 거리가 약 9000km 늘어나고 운송 기간도 2주 가량 추가되지만 중동 지역의 만성적인 정세 불안에 대비한 ‘플랜 B’ 노선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놓은 것이다.
쉘 역시 에너지 자원 의존도가 높은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한국 산업계와는 혈맹에 가까운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국내에서는 HD현대오일뱅크와 합작 법인인 ‘현대쉘베이스오일’을 설립해 윤활기유를 생산하고 있으며 한국 법인인 ‘한국쉘석유’를 코스피에 상장해 운영 중이다. 또한 오랜 기간 삼성중공업과 HD현대 등에 대형 유조선과 수조원 규모의 FLNG를 발주해 왔다. 쉘의 상징적 자산인 ‘프렐류드(Prelude) FLNG’ 건조 프로젝트도 삼성중공업과 진행했다.
쉘은 오랜 기간 네덜란드와 영국의 자본이 결합한 이중 상장 체제를 유지해왔다. 1907년 네덜란드의 ‘로열 더치’와 영국의 ‘쉘 운송·무역’의 합병으로 탄생한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2021년 말 경영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거점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영국 런던으로 단일화하고 사명에서 ‘로열 더치’도 삭제했다. 현재 쉘의 최대주주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8.29%)이며 뱅가드(5.46%), 노르웨이 국부펀드(2.43%) 등 글로벌 기관 투자자들도 지분을 가지고 있다. 분산된 소유 구조 덕분에 쉘은 시장 논리와 주주 이익에 기반한 투명한 거버넌스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쉘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은 2023년 취임한 와엘 사완(Wael Sawan) CEO다. 레바논 출신으로 캐나다 맥길 대학교와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MBA)을 거친 그는 1997년 오만 국영 회사인 오만석유개발공사(PDO)에 엔지니어로 입사하며 에너지 분야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PDO는 오만 정부가 대주주이지만 쉘이 3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쉘의 우수한 미래 인재들이 실무를 익히는 ‘에너지 사관학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5년 이상 쉘의 핵심 부서를 두루 거치며 역량을 입증했다. 사완 CEO는 취임 이후 ‘주주 가치 극대화’를 목표로 핵심 수익원인 화석 연료와 LNG 사업의 효율성을 끌어올리는 ‘선택과 집중’ 경영 전략을 줄곧 구사해왔다.
중국 최대 국영 석유·가스 기업인 중국석유천연가스(CNPC)도 호르무즈 봉쇄 리스크의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CNPC는 국무원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SASAC)가 지분 100%를 보유한 완전 국영 기업이다. CNPC는 일찌감치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을 예견하고 ‘중앙아시아-중국 가스관’ ‘러시아-중국 원유관’ ‘중-미얀마 원유·가스 파이프라인’ 등의 대체 수단을 마련해 놨다. 이러한 탄탄한 물류망을 바탕으로 현재 중국 내 원유 생산의 50%, 천연가스 생산의 7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CNPC의 주요 고객사는 중국 내 국영 정유사들과 아시아 전역의 에너지 기업들이다. 자회사인 중국석유를 통해 중국 전역의 유통망과 산업 단지에 원유·가스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인접국과도 활발한 거래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 기업과도 인연을 맺고 있다. 과거 한국가스공사와 모잠비크·캐나다 LNG 액화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다. 이후에도 천연가스 수급 안정을 위한 트레이딩, LNG 저장탱크 건설, LNG 터미널 시운전 및 교육훈련 등에서 협력관계를 이어왔다.
현재 CNPC를 이끄는 수장은 다이 허우량(Dai Houliang) 회장이다. 그는 중국 에너지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에너지 전문가’로 통한다. 창저우 대학교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난징 공업대학교에서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2017년 중국 과학기술계 최고 명예직인 중국공정원(CAE) 원사로 선출됐다. 중국 최대 정유사인 시노펙(Sinopec) 회장을 거쳐 2020년 CNPC 수장 자리에 올랐다. 허우량 회장은 취임 이후 디지털 전환과 친환경 에너지 비중 확대를 지속 강조해왔다. 동시에 중동 리스크 대응 차원으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와의 자원 동맹을 공고히 하는 일명 ‘에너지 실크로드’ 전략을 주도해왔다.
김계수 세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는 지정학적 위기를 넘어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판도 자체가 흔들리는 계기가 되고 있다”며 “과거에는 에너지 패권이 단순히 ‘얼마나 많은 자원을 보유했는가’에 달려 있었다면 이번 사태를 통해 ‘비상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을 갖췄는지’가 더욱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나라처럼 원유 의존도가 높은 국가 입장에선 공급망 분산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며 “지금부터라도 다양한 기업들과 손잡고 새로운 운송 경로를 확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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