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임대차 시장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무조건 전세’ 일변도의 분위기가 짙었던 과거와 달리 월세 매물에 대한 선호도가 부쩍 높아졌다. 임대인의 사정이나 시장 분위기의 영향을 일부 받긴 했지만 결정적 이유는 임대인과 임차인들이 동시에 월세를 선호하는 쪽으로 기운 영향이 크다. 특히 전세대출 이자 부담이나 월세 부담이 거의 비슷한데다 설령 대출을 받지 않더라도 최소 10억원이 넘는 뭉칫돈을 보증금으로 묶어두는 게 지금과 같은 증시호황 속에선 오히려 손해라는 판단에 일부러 월세 매물을 찾는 임차인이 늘고 있다. 앞으로 정부 규제로 임대사업자·다주택자 전세 매물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 ‘전세의 월세화’는 더욱 가속화 될 전망이다.
급변하는 임대차 시장…임대인 “전세보증금 쓸 곳 없다” 임차인 “뭉칫돈 굴리는 게 이득”
최근 서울·수도권 부동산을 중심으로 월세 매물이 빠르게 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해 1월 월세 거래량은 16만9305건으로 전년 동월 대비 무려 42.5%나 급증했다. 전국 아파트의 월세 비중 역시 전년 동월 대비 6.2%p 상승한 50.5%를 기록했다.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는 계약 비율도 부쩍 늘었다. 올해 1~3월 서울 아파트 전·월세 계약 가운데 전세를 월세로 갱신한 계약 비중은 전년 동기 대비 7%p 상승한 48.2%를 나타냈다. 지난달에는 그 비중이 51.8%에 달했다.
부동산업계 등에 따르면 월세 매물과 계약 건수 증가는 임대인와 임차인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로 분석된다. 임대인 입장에선 전세보증금을 활용하더라도 월세만큼의 수익을 올리기 어렵다 보니 자연스레 월세 쪽으로 기우는 추세다. 실제로 가장 안정적이면서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2년 만기 적금’ 상품의 평균 금리는 3~4% 수준에 불과하다. 예금이나 적금 외에 투자 수단은 손실 가능성이 높다 보니 향후 다시 돌려줘야 하는 전세보증금을 투자금으로 활용하는 사례는 드문 편이다.
임차인들도 월세 쪽으로 기울고 있다. 전세보증금을 대출로 마련하든 본인 돈으로 지불하든 전세 보단 월세가 유리하다는 판단에 기인한 결과다. 가령 전세보증금을 대출로 마련한다고 가정했을 땐 현행 전세자금대출 평균 금리(4%)는 현재 시장의 전·월세 전환율(4%, 전세보증금 1억원 당 월세 40만원)과 거의 비슷하다. 대출로 전세보증금을 마련하면 이자 부담이나 월세 부담이나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전세보증금 전액을 개인 자금으로 충당할 경우엔 그만큼 뭉칫돈을 활용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특히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주식 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있어 월세를 내고 뭉칫돈을 운용하는 게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실제로 한국거래소 등에 따르면 코스피 지수는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2000대 중반에서 머물렀으나 정부의 국내 주식 시장 활성화 정책에 힘입어 지난 2월 25일 사상 처음으로 6000선을 돌파했다. 최근 중동전쟁 여파로 소폭 하락하긴 했으나 여전히 5000선은 유지하고 있다. 국내 주식 계좌수도 2024년까지만 해도 8000만개 수준에 머물렀으나 작년부터 급증해 1억개를 돌파했다. 지난 2월 24일에는 1억180만3688개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증시 대기자금인 투자자 예탁금 역시 지난 1월 사상 최초 100조원을 돌파한 후 현재 120조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전세 소멸은 자연스러운 현상, 투자시장 활성화 될수록 임차인부터 전세 외면할 것”
임차인의 월세 선호는 전세 보증금이 높은 지역일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전제 대신 월세를 선택하면서 남은 여유 자금 규모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주식 등 다른 투자처에 투자할 경우 그만큼 큰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지난 1월 부동산 정보 플랫폼 다방이 전용 84㎡ 아파트의 평균 매매가와 전세 보증금 수준을 분석해 발표한 ‘아파트 다방여지도’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10~12월) 기준 서울에서 평균 전세 보증금이 가장 높은 지역은 서초구였다. 서초구의 평균 전세 보증금은 11억3682만원에 달했다. 이어 강남구(10억4462만원), 송파구(8억4540만원), 종로구(8억6967만원) 등의 순이었다.
서울 서초구 소재 H부동산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월세 임대 문의가 부쩍 늘어나긴 했다”며 “월세 아파트를 구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자기가 가진 현금에 모자란 보증금은 전세대출을 받는데 이자 비용이나 월세나 크게 차이가 없다 보니 차라리 주식이나 다른 투자로 돈을 굴리면서 월세로 사는 게 유리하다고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실 전세 임대라는 개념 자체가 예금 이자율이 높은 후진국에나 유리하지 지금 같은 시대엔 어울리지 않은 방식이긴 하다”며 “투자시장이 활성화 된 외국은 전세 개념 자체가 없다고 들었는데 우리나라도 임대차 시장 자체가 월세 위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서울 강남구 소재 S부동산 관계자는 “강남 어지간한 아파트는 전부 전세보증금이 15억원이 넘는데 그 정도 현금을 척척 내놓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나”라며 “결국 전세대출을 받을텐데 그 이자만 해도 1억원당 40만원 수준인 월세랑 크게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10억원을 이자도 없는 전세보증금으로 박아 놓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요즘엔 주식 외에도 ETF 등 손실이 적으면서 5% 수준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다른 금융 상품도 많다 보니 대부분 보증금을 5억원 안팎 수준으로 맞추고 나머지 현금은 주식 등 다른 재테크로 돌리겠다는 사람이 많다”며 “월급만으론 모아선 집 살 돈을 모으기 어려워서 내린 결정 같다. 아마 앞으로 월세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분야 전문가들도 앞으로 전세를 끼고 집을 매입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전세 자체가 임대인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고 임차인 입장에서도 목돈을 다른 투자 수단으로 돌리는 게 유리하기 때문에 임대시장 전체가 월세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았다. 조주현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과거 전세가 임차인의 주택 마련의 징검다리이자 임대인의 자금 조달 수단 등 사적 금융의 역할을 했다면 현재는 자산 운용 방식이 다변화되면서 그 효용성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며 “사실 전세는 저성장과 고금리가 맞물린 과거의 산물로 투자 시장이 활성화된 선진국형 경제 구조에서는 일찌감치 사라졌어야 할 제도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코스피 5000~6000 시대와 같은 증시 호황기에는 임차인들이 굳이 수억원이 넘는 목돈을 이자도 없는 전세보증금에 묶어두려 하지 않는다”며 “보증금으로 묶일 돈을 차라리 삼성전자 같은 우량주나 배당 수익이 확실한 ETF에 투자하면 월세를 내고도 남는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인식이 이미 시장 전반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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