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란 정부가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를 비트코인으로 받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도 새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결제 방식의 변화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의 경제적 압박을 무력화하고 국가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이란의 치밀한 전략이 숨어 있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 압도적인 채굴 경쟁력을 가진 이란 입장에선 비트코인 가치가 오르면 자연스레 경제적 이익도 커질 수밖에 없다.
원유 대국➞저렴한 전기료➞채굴 수익성 극대화➞국가 디지털 자산 증식➞달러 제재 무력화
이란 정부가 미국과의 휴전 합의 이후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에 통행료를 암호화폐로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8일(현지시간) 이란 석유·가스·석유화학 제품 수출업자 협회의 하미드 호세이니 대변인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유조선을 대상으로 검문 및 통행료 징수를 실시할 계획이다”며 “해당 통행료는 반드시 암호화폐로 결제해야 한다”고 밝혔다.
외신 등에 따르면 이란 정부가 책정한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는 원유 1배럴당 1달러 수준이다. 선사가 화물 내역을 이메일로 사전 통보하면 이란 정부가 납부 금액을 산정해 디지털 화폐 결제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약 20%가 집중되는 호르무즈 해협의 막대한 물동량을 감안할 때 암호화폐 징수는 대규모 디지털 자산을 국고로 귀속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전망이다.
글로벌 암호화폐 업계 등에 따르면 이란이 비트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내세운 이유에는 미국의 경제 제재 회피 및 수익 극대화 등이 꼽힌다. 그동안 이란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의 결제망 접근이 제한돼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SWIFT의 결제망은 은행 간 송금 지시를 전달하는 핵심 서비스로 미국의 대이란 제재 이후 이란의 주요 은행들의 시스템 접근이 차단됐다. 해외로 돈을 보내거나 해외에 있는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설령 우회로를 통해 자금을 보낸다 해도 글로벌 기축 통화인 달러(USD)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보니 미국의 감시나 제재를 피하기 어려웠다. 모든 달러 거래는 구조적으로 미국 은행을 거쳐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 재무부 산하 제재 집행 기관인 해외자산통제국(OFAC)이 거래를 즉각 차단하고 자산을 동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랜 기간 송금 경로와 결제 수단 모두 제약을 받아 온 것이다.
이란은 암호화폐를 돌파구로 선택했다. 미국의 감시와 제재를 피하기 어려운 달러 대신 암호화폐를 적극 활용했으며 관련 인프라 구축에도 공을 들였다. 덕분에 현재 이란은 세계 상위권의 채굴 경쟁력과 수익성을 자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핀테크 전문 리서치 기관 코인로(CoinLaw)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이란의 비트코인 채굴(해시레이트) 점유율은 4.2%로 세계 5위 수준이다. 또 암호화폐 전문 매체 코인피디아(Coinpedia)에 따르면 이란에서 비트코인 1개를 채굴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1320달러에 불과하다. 현재 비트코인이 개당 7만달러 안팎 수준에서 거래되는 것을 감안하면 생산 비용 대비 50배가 넘는 이익을 챙기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기적의 수익률’은 이란의 저렴한 전기료 덕분이다. 통상 비트코인 채굴 비용의 80~90%는 전기료가 차지하는데 이란 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전기료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란의 산업용 전기 요금은 킬로와트시(kWh)당 0.005달러 수준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보조금 외에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도 풍부해 전기 생산 단가 자체도 낮은 편이다. 세계 통계 서비스 사이트 월드오미터(Worldometers)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이란의 석유 매장량은 전 세계 3위(11.82%), 천연가스 매장량은 러시아에 이어 세계 2위를 각각 기록했다.
이란 정부는 암호화폐 관련 제도적 지원에도 적극 나섰다. 2019년 암호화폐 채굴을 정식 산업군으로 편입해 합법화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2020년에는 중앙은행이 승인한 암호화폐에 한해 수입 결제 대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마련해 가상자산을 제도권 금융 안으로 편입시켰다. 단순한 신산업 육성을 넘어 에너지 자원을 디지털 화폐로 치환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국가 경제 성장까지 도모하겠다는 의도였다.
자국 통화인 리알화의 급격한 가치 하락 역시 암호화폐 활성화를 부채질했다. 지난해 말 기준 달러당 환율은 140만리알에 달한다. 2015년 이란과 서방국가 간에 핵합의가 타결됐을 때 달러당 3만2000리알 정도였던 것과 비교하면 약 10년 만에 화폐 가치가 44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 화폐 가치가 휴지조각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일상적인 거래조차 돈뭉치를 들고 가야 할 정도가 되다 보니 이란 국민들은 자산 방어를 위해 리알화를 금이나 달러, 암호화폐 등으로 바꾸는 게 일상이 됐다.
전문가들은 이란의 암호화폐 축적 행보가 글로벌 금융 질서에 새로운 균열을 만드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란 입장에서 미국의 경제 제재를 피할 수 있는 가상화폐 패권 강화는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다”며 “다만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글로벌 공공자원을 지렛대 삼아 가상자산을 국고로 귀속시키는 방식은 향후 국제 금융 시스템과 에너지 시장에 전례 없는 변동성을 야기할 수도 있는 위험한 시도로 평가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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