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생활하고 학습하는 초등학교 인근에 성인 방송물을 촬영하는 스튜디오가 들어섰지만 이를 제재할 마땅한 법적 근거가 없어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현행 교육환경 보호 제도가 디지털 기반 신종 유해업종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서 ‘체감상 명백한 유해시설’조차 규제하지 못하는 법적 사각지대가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 역시 산업 환경과 콘텐츠 소비 구조가 급변한 만큼 교육환경 보호 기준을 현실에 맞게 전면 재정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한 초등학교 인근 건물 지하에는 ‘엑셀방송’ 용 성인방송 스튜디오가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엑셀방송은 여러 명의 인터넷방송 진행자(BJ)를 출연시켜 시청자가 지시하는 선정적인 춤을 추거나 자극적 행동을 하도록 한 뒤 후원금 순위를 엑셀 문서처럼 정리해 보여주면서 후원을 유도하는 방식의 인터넷 방송 콘텐츠다.
이처럼 성장기 학생들에게 유해한 콘텐츠들이 가득하다 보니 엑셀방송은 지난해 국세청으로부터 사회 규범을 어지럽히고 건전한 법질서를 위배하는 유해 콘텐츠로 사이버 룸살롱으로 규정됐다. 최근에는 영상에 출연하는 BJ들 중 일부가 길거리에서 흡연을 하거나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는 모습까지 목격되면서 교육환경 침해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학부모들의 지속적인 민원으로 강남구청은 교육청의 협조를 받고 해당 시설에 합동 점검을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해당 시설을 처벌할 근거가 없어 건물 밖 흡연을 자제하고 여성들이 복장에 주의해달라는 요청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학교 역시 가정통신문을 통해 유관기관과 계속 협력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국내 교육환경법은 학교 경계에서 직선으로 200m 이내 지역을 교육환경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학생의 보건·위생, 안전, 학습과 교육환경 보호를 침해하는 영업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방송 스튜디오는 교육환경 보호구역 내에 속해 있지만 스튜디오 대여업으로 등록돼 교육환경법상 제한 업종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 스튜디오 내 밀폐된 공간이 확인되지 않아 여성가족부 고시에 따른 청소년 유해업소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이에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체감상 유해하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규제의 사각지대가 드러났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학생들이 매일 오가는 통학로 인근에서 성인 콘텐츠 제작과 관련된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초등학교 1학년과 6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안지호 씨(43·여)는 “아이들이 매일 오가는 길목에서 이런 시설이 운영된다는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렵다”며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게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고 비판했다. 이어 “첫째가 6학년이 되면서 관련 주제에 호기심을 보일 때가 있어 가정에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학교 주변에 해당 시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어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학부모 김승원 씨(47·남)는 “아이들과 직접적인 접촉이 없더라도 노출되는 환경만으로도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우려했다. 또 “요즘 아이들은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정보를 빠르게 접하는 만큼 호기심도 훨씬 빠르게 커진다”며 “이런 상황에서 학교 주변까지 성인 콘텐츠와 연관된 공간이 들어오는 것은 아이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어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이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 조치도 할 수 없다는 점이 더 답답하다”며 “시대가 달라진 만큼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기준이 더 체계적으로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해외에서는 국내보다 성인 콘텐츠 관련 시설의 입지와 운영을 보다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미국은 성인 콘텐츠 산업이 합법인 국가지만 규제는 주와 지방자치단체 단위로 세분화돼 적용된다. 대표적으로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욕 등에서는 ‘용도지역 규제(zoning law)’를 통해 성인 산업 시설의 입지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텍사스의 경우 성인 관련 업소를 학교나 주거지역으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지역에만 허용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역시 지방정부 조례를 통해 학교와 공원 인근 입점을 제한한다. 뉴욕 또한 성인 업소를 특정 구역으로 분리하는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성인 영상 산업이 합법인 일본 역시 교육시설과의 거리 유지가 중요한 규제 기준으로 작용한다. 지역사회와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촬영소와 관련 사무소의 입지에는 교육시설 및 주거지역과 일정 거리를 두도록 하는 등 제한이 적용된다. 독일 역시 16개 주마다 세부 규정이 다르지만 성인 산업 시설은 학교, 유치원, 청소년시설 인근에서 영업하는 것이 제한된다. 베를린의 경우 도시계획법으로 특정 구역에만 허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와 기술의 속도를 현행 법체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성장기에 있는 아동의 경우 사소한 노출만으로도 인식과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만큼 관련 규정 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성인과 달리 성장기 아동은 성인지 감수성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무엇이 적절한지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이로 인해 선정적인 콘텐츠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해외에서도 유사한 문제를 겪으며 제도적 대응을 마련해 온 만큼 관련 사례를 참고해 국내 실정에 맞는 규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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