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권을 대표하는 압구정동 부동산 시장에서 세 부담을 줄이려는 장기보유자들이 매물을 내놓으면서 호가를 낮추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수십 년 전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아파트를 매입한 집주인들은 현재 시세보다 수십억원을 낮춰 팔더라도 상당한 시세차익을 확보할 수 있어 최고가를 고집하기보다 세금과 향후 주거비 등을 고려해 매도가를 조정하는 분위기다. 다만 매수자들은 추가 가격 하락 가능성을 지켜보며 관망세를 유지하고 있어 호가가 내려가도 실제 거래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31일 르데스크 취재에 따르면 압구정동 일대에서는 최근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비롯한 주요 단지의 거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매수자들이 가격 움직임을 지켜보며 관망세로 돌아서면서 매물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중개업소를 찾는 사람도 지난해와 비교해 크게 감소했다는 게 현지 중개업소들의 설명이다. 반면 지난해에는 재건축 기대감과 집값 상승세가 맞물리면서 매수자들 사이에서 ‘지금이 가장 싸다’는 인식이 강했고 조건이 괜찮은 매물이 나오면 집을 확인한 직후 계약 의사를 밝히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실제 압구정 일대에서는 최근 직전 거래보다 수억원에서 10억원 이상 낮은 가격에 거래된 사례가 잇따라 확인되고 있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지난해 9월 현대건설로 재건축 시공사가 선정된 압구정신현대아파트 전용면적 108.88㎡는 지난해 7월 68억5000만원에 거래됐지만 지난 6월에는 61억원에 손바뀜됐다. 약 11개월 만에 거래가격이 7억5000만원(10.9%) 낮아진 셈이다.
현대3차아파트에서는 하락 폭이 더욱 크게 나타났다. 전용면적 82㎡는 지난해 11월 60억7000만원에 거래되며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지만 지난 6월에는 46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불과 7개월 만에 직전 거래가격보다 14억2000만원(23.4%) 낮아졌다.
김해중 신라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지난해에는 가격이 계속 오르다 보니 매물을 보고 5분 만에 계약서를 쓰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며 “당시에는 앞으로 가격이 더 오를 것이란 기대가 강했지만 지금은 집을 보러 오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거래가 줄면서 기존 호가보다 가격을 낮추는 집주인들도 나타나고 있다. 실제 압구정동에서는 최근 당초 130억원 수준에 내놓았던 매물의 가격을 약 100억원까지 낮춘 사례도 파악됐다. 기존 호가보다 약 30억원을 낮춘 셈이다. 해당 매도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빠른 매도를 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수억원에서 10억원 안팎 가격을 낮춘 매물도 일부 나오고 있다. 현재 압구정동 일대에서는 평형과 단지에 따라 60억원대부터 100억원을 웃도는 매물까지 나와 있지만 절대적인 가격 수준이 워낙 높아 실제 매수에 나설 수 있는 수요층은 제한적이다.
특히 가격 조정에 나서는 집주인 가운데는 수십 년간 압구정에서 거주한 장기보유자들이 적지 않다는 게 현지 중개업계의 설명이다. 이들은 현재와 비교해 훨씬 낮은 가격에 주택을 취득한 경우가 많아 최근 호가에서 20억~30억원을 낮춰 매도하더라도 상당한 시세차익을 확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최고 호가를 고집하기보다 양도소득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과 매도 이후 필요한 주거비 등을 따져 실제 확보할 금액을 기준으로 매도가를 정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김 대표는 “예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분들 가운데 처음부터 자산가였던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거주하는 사이 아파트 가격이 크게 올라 결과적으로 큰 자산을 보유하게 된 경우가 있다”며 “이런 분들은 세금과 앞으로 필요한 자금을 계산해보고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금액을 확보할 수 있다면 처음 내놓았던 가격보다 낮춰서라도 매도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매도자들이 호가를 낮추고 있음에도 실제 거래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 매수자들은 최근 낮은 가격의 거래가 하나둘 등장하는 상황에서 추가 조정 가능성을 지켜보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가격을 낮춘 매물이 나올수록 오히려 더 저렴한 매물이 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면서 계약 결정을 미루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는 게 현장의 설명이다.
그렇다고 일부 낮은 가격의 매물이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압구정 집값이 본격적인 하락세에 접어들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가격을 낮춰 매도하려는 집주인이 있는 반면 재건축 이후 추가적인 자산가치 상승을 기대하며 계속 보유하려는 소유주도 적지 않아서다. 시장에 나오는 매물 자체가 제한적인 만큼 일부 급매 거래가 단지 전체의 가격 흐름을 대표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장기보유자들이 압구정 주택을 처분한 이후 확보한 자금이 어디로 이동할지도 관심사다. 현지 중개업계에 따르면 준공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압구정 아파트에서 재건축을 기다리기보다 주택을 처분한 뒤 교통과 생활 인프라가 잘 갖춰진 다른 지역의 신축·준신축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려는 고령 집주인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수십 년간 쌓인 시세차익을 실현한 장기보유자의 경우 압구정 주택을 현재 호가보다 낮춰 팔더라도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다른 지역의 신축 아파트를 구입하고 상당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압구정에서 빠져나온 고액 자산가들의 매수세가 특정 지역이나 단지로 집중될 경우 해당 지역의 고가 주택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김 대표는 “압구정에서 오래 거주한 분들 가운데는 낡은 아파트에서 재건축을 기다리기보다 지하철을 이용하기 편하고 커뮤니티 시설 등이 잘 갖춰진 새 아파트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다”며 “압구정 집을 처분한 뒤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으면서 생활하기 편리한 신축 아파트를 찾는 수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압구정에서 나타나는 호가 조정과 거래 위축에는 세 부담과 초고가 주택의 제한적인 매수층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유세 등 부담이 커질수록 자산가치에 비해 현금 여력이 부족한 일부 장기보유자가 매도에 나설 수 있지만 수십억~100억원을 웃도는 주택을 매입할 수 있는 수요층은 제한돼 있어 매물이 늘더라도 거래 증가로 곧바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서진형 광운대 부동산법무학과 교수는 “조세 부담이 강화되면 보유하고 있는 자산가치에 비해 현금 여력이 부족한 집주인들은 주택을 매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며 “문제는 압구정과 같은 고가주택은 매수자가 제한적이라는 점이다”고 말했다. 이어 “1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마련해 주택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만큼 매물이 늘어날 경우 일부 가격이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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