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기업·기관의 노사 갈등에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다른 기업의 근로자들까지 일손을 놓고 파업에 동참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산별노조 연대투쟁’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노동계는 개별 기업을 넘어 산업 전체 근로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연대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경제계는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 직접적인 특정 분야 전체의 업무·생산 차질로 인한 국가 경제 피해를 우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산별노조의 설립 취지는 존중하되 개별 기업과 소비자에게 불필요한 피해가 전가되지 않도록 쟁의행위의 범위와 방식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해관계 없어도 파업·집회 동참…산별노조 연대투쟁에 선량한 기업까지 ‘도미노 피해’
4일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이하 금융노조)은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 일대에서 대규모 총파업 집회를 열었다. 이날 오전 11시30분부터 동화면세점과 대한문 사이에서 진행된 집회에는 경찰 비공식 추산 약 1만4000명의 조합원이 모였다. 이번 총파업의 핵심 쟁점은 정부가 추진 중인 공공기관 지방이전이다. 이날 집회 현장은 한국산업은행·IBK기업은행·한국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 지방이전에 반대하는 현수막과 손팻말로 가득 찼다. 집회에 참여한 조합원들도 관련 구호를 잇달아 외쳤다.
집회에는 국책은행 노조원뿐 아니라 공공기관 지방이전과 무관한 시중은행, 카드사, 보험사 등 민간 금융회사 소속 노조원들도 다수 참석했다. 현장에선 QR코드를 활용해 참석자들의 출석 여부를 확인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후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현장을 벗어나 인근 카페나 편의점 등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부 참석자들의 모습도 곳곳에서 목격됐다. 르데스크가 현장에서 만난 복수의 민간 금융회사 노조원들은 집회의 구체적인 취지나 참석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소속 노조의 안내에 따라 현장을 찾았다고 증언했다. 집회에 참석한 한 KB국민은행 노조원은 “노조에서 참석하라는 안내를 받고 나왔고 적어도 오후 4시까지는 현장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오늘 자리를 비우는 동안 처리해야 할 업무 일부는 다른 동료에게 부탁하고 왔다”고 말했다.
집회의 취지·목적과 이해관계가 없는 타 금융회사 근로자들까지 참여하는 배경에는 국내 노동계의 ‘산별노조’ 체계가 자리하고 있다. 산별노조는 개별 기업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기업별 노동조합과 달리 동일하거나 유사한 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을 하나의 노동조합으로 묶은 조직 형태다. 개별 사업장의 임금·근로조건뿐 아니라 고용과 산업정책 등 업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현안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금융노조는 금융산업 종사자들이 참여하는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산하에 각 금융기관·기업 별 지부를 두고 있다.
기업 단위를 넘어 산업별로 노동조합을 구성하는 것은 법적 근거를 두고 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동조합법)’ 제2조에는 노동조합을 근로자가 주체가 돼 근로조건의 유지·개선과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같은 법 제10조에서도 2개 이상의 시·도에 걸친 단위노동조합과 연합단체인 노동조합의 설립신고 절차를 별도로 규정하고 있다. 제10조 2항에서는 동종 산업의 단위노동조합으로 구성된 ‘산업별 연합단체’와 ‘전국 규모의 산업별 단위노동조합’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여론 안팎에선 ‘산별노조의 연대투쟁’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정 금융기관·기업의 현안이 산별노조 전체의 공동 투쟁 의제로 확대될 경우 해당 사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다른 지부 조합원들까지 집회나 파업에 참여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인력 공백은 남아 있는 직원들의 업무 부담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기업 역시 대체 인력 배치와 업무 조정 등 추가적인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금융업의 경우 업무 특성상 인력 공백에 따른 여파가 소비자 불편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높은 직종으로 분류된다. 은행 영업점의 창구 업무를 비롯해 대출·외환·기업금융·자산관리 등 상당수 업무가 담당 인력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만큼 특정 영업점이나 부서에서 여러 직원이 동시에 자리를 비울 경우 고객 대기시간이 늘어나거나 업무 처리가 지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카드·보험사 역시 고객 상담과 각종 심사·영업 등의 업무에서 인력 이탈이 발생할 경우 처리 지연이나 남은 직원들의 업무 부담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일선 영업 현장에서는 집회 참석에 따른 인력 공백으로 업무 부담이 늘었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리기도 했다. 서울 소재 신한은행 영업점에서 근무 중인 한 은행원은 “갑작스럽게 일부 직원이 집회에 참석하면서 평소보다 적은 인원으로 영업점을 운영하게 됐다”며 “가뜩이나 금요일이라 고객이 몰리는 상황에서 남아 있는 직원들이 빠진 인원의 업무까지 나눠 맡다 보니 업무 부담이 평소보다 커졌다”고 말했다. 이어 “근무 인원이 줄어든 만큼 고객 상담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창구 업무에도 평소보다 시간이 더 소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별노조 단위의 파업·집회로 인한 피해는 비단 금융권만의 일이 아니다. 국내 대표적인 산별노조 중 하나인 전국금속노동조합(이하 금속노조) 역시 자동차·조선·철강·기계 등 금속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하나의 노동조합 아래 결집한 형태인데 산별노조 단위의 쟁의 행위가 벌어질 때마다 수많은 기업들에서 인력 공백이 발생한다. 일례로 지난달 26일 금속노조가 전국 동시 파업을 벌였을 당시 HL만도 평택공장에서 발생한 하청근로자 사망사고와 이에 따른 진상규명·재발방지 대책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해당 사고는 HL만도 사업장에서 발생한 사안이었지만 금속노조 차원의 공동 투쟁으로 확대되면서 기아와 한국GM 등 다른 기업 소속 조합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이로 인해 해당 기업에서도 파업 참여 인원만큼 인력 공백이 발생했고 일부 생산 현장에서는 조업 차질에 대한 부담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김계수 세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산별노조는 개별 사업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노동 현안에 공동 대응하고 상대적으로 교섭력이 약한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순기능이 존재한다”면서도 “다만 특정 사업장의 현안을 이유로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다른 기업의 근로자들까지 일손을 놓게 되면 해당 기업과 주변 동료들은 노사 갈등의 당사자가 아님에도 생산·영업 차질과 인력 운용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산별노조 쟁의 활동의 피해가 소비자나 협력업체 등 제3자에게까지 전가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산별 차원의 연대 취지는 살리되 개별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쟁의행위의 범위와 방식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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