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조정한 모수개혁이 시행됐지만 연금재정의 지속가능성과 기금운용 체계에 대한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개정된 국민연금법에 따라 올해부터 보험료율을 단계적으로 13%까지 높이고 소득대체율을 43%로 조정했지만 기금 소진 시점은 2065년으로 8년 늦춰지는 데 그치면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1400조원이 넘는 국민 노후자금을 운용하면서도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여전히 이해관계자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하는 지배구조 개편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본과 캐나다 등 주요 공적연금이 투자·금융 전문가 중심의 독립적인 의사결정 체계를 구축한 것과 비교하면 국민연금 역시 보험료·급여 조정에 그칠 게 아니라 기금운용 구조까지 손보는 후속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보험료 올렸지만 2065년이면 다시 고갈…모수개혁만으론 한계
지난해 개정된 국민연금법에 따라 보험료율은 기존 9%에서 올해부터 매년 0.5%p씩 인상돼 2033년 13%에 도달한다. 소득대체율은 기존 41.5%에서 올해부터 43%로 높아졌다. 군복무·출산 크레딧 확대와 저소득 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 국가 지급보장 명문화 등도 함께 시행됐다. 그러나 재정 전망을 보면 개혁 효과는 기금 고갈 시점을 뒤로 미루는 수준에 그쳤다. 정부는 장기 기금수익률을 기존 4.5%에서 5.5%로 1%포인트 끌어올리면 기금 소진 시점이 2071년까지 연장될 것으로 보고 있다. 보험료율 조정뿐 아니라 기금운용 수익률이 연금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는 의미다.
인구구조 변화도 부담이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2030년 2120만명에서 2095년 783만명까지 줄어드는 반면 노령연금 수급자는 2030년 781만명에서 2063년 1673만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가입자 대비 노령연금 수급자 수를 뜻하는 제도부양비도 2030년 36.8%에서 2079년 159.0%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보험료를 부담하는 사람은 줄고 연금을 받는 사람은 늘어나는 구조가 갈수록 심화되는 셈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만 조정하는 방식으로는 사실상 기금고갈 시점만 늦추는 이른바 땜질처방이라는 우려가 나오면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위해 OECD 주요 국가들이 활용하는 자동조정장치 도입이 대안으로 지목된다. 자동조정장치는 물가상승률뿐 아니라 기대수명 증가와 가입자 수 감소 같은 인구·경제 변수를 연금급여 인상 수준 등에 반영해 재정 부담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방식이다.
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24개국이 재정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자동조정장치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2004년부터 물가·임금 상승률 외에 기대수명 증가와 노동인구 감소를 반영하는 ‘거시경제 슬라이드’를 도입했다. 정치권이 매번 보험료와 급여 수준을 직접 조정하지 않아도 인구구조 변화에 따라 연금재정을 일정 부분 자동으로 보정하도록 한 것이다.
단순히 보험료율을 계속 올리는 것은 가입자 부담을 키우고 급여를 지나치게 줄이면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연금 본연의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금운용 체계 개편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수익률을 1%p 높였을 때 기금 소진 시점을 추가로 6년가량 늦출 수 있다고 전망한 만큼 기금 자체의 운용 능력을 높이는 구조개혁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기금 규모가 커질수록 단 0.1%p의 수익률 차이가 장기적으로 막대한 자산 차이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앞으로의 연금개혁은 ‘얼마나 걷고 얼마나 줄 것인가’뿐 아니라 ‘누가 어떻게 기금을 운용할 것인가’까지 다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1458조 굴리는데 최고결정기구는 이해관계자 중심…전문성·독립성 한계
국민연금 기금운용 체계 개편의 핵심으로는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지목된다. 현재 국민연금은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기금운용위원회가 기금운용지침과 자산배분, 투자정책·전략 등 주요 방향을 결정하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가 이를 집행하는 구조다.
기금운용위원회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관계부처 차관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등 당연직 6명, 관계전문가 2명, 사용자·근로자 대표 각각 3명, 지역가입자 대표 6명 등 총 21명으로 구성된다. 가입자의 이해를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자산배분과 위험관리, 해외·대체투자 등 고도의 금융 전문성이 필요한 사안을 다루는 최고 의사결정기구가 이해관계자 대표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꾸준히 제기됐다.
국민연금의 운용 규모는 이미 전통적인 사회보장기금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난해 말 전체 자산은 1458조원이다. 이 가운데 금융투자부문만 1457조4000억원이다. 해외주식이 550조5000억원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국내채권 304조8000억원, 국내주식 263조7000억원, 대체투자 232조6000억원 등을 운용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 변화와 환율·금리·지정학적 위험에 상시 대응해야 하는 거대 기관투자가라는 점에서 의사결정 체계 역시 그 규모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해외 주요 공적연금은 최고 의사결정 단계부터 금융 전문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일본 GPIF의 경영위원회는 경영위원 9명과 이사장 등 10명으로 구성되는데 경영위원 9명 가운데 7명은 민간 투자·금융 전문가를 공모해 후생노동성 장관이 임명한다. 나머지 2명만 노사단체에서 각각 1명씩 추천받는다. 경영위원의 임기도 원칙적으로 5년을 보장한다.
캐나다 CPP 역시 CPPIB 이사회 12명을 일반기업과 금융기관 출신 전문가로 구성한다. 공모를 통해 후보자 풀을 만든 뒤 연방정부와 주정부 추천인으로 구성된 인사추천위원회의 제청을 거쳐 재무장관이 추천하고 연방정부 내각이 공식 임명하는 방식이다. 특히 직무 내용과 필요한 기술, 경험과 태도 등을 담은 직무기술서를 마련해 이사의 자격요건과 선정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단순한 이해관계 대표보다 실제 운용 능력을 검증하는 데 무게를 두는 구조다.
노르웨이 GPFG도 노르웨이은행 이사회가 기금운용의 최고 의사결정 역할을 맡고 있으며 총재 1명과 부총재 2명, 외부 전문가 6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된다. 총재·부총재는 6년, 외부 이사는 4년의 임기를 보장한다. 네덜란드 ABP는 노사·수급자 대표가 이사회에 참여하지만 독립 의장을 두고 4년 임기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대표성과 독립성을 함께 확보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민연금도 기금운용위원회를 민간 투자·금융 전문가 중심의 상설기구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원 전원을 상근직으로 두고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다면 임기를 보장하고, 금융·투자 분야의 구체적인 경력과 전문성을 법정 자격요건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와 가입자 대표는 국민연금공단 이사회 등을 통해 공단 경영과 사무집행을 감독하고 실제 기금운용 의사결정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역할 분담도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독립성 강화 역시 근본적인 연금개혁을 위한 필수로 지목된다. 국민연금은 국내 자본시장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큰 만큼 시장안정이나 기업정책 등 외부 정책목표와 가입자의 장기 수익률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기금이 정부 정책을 보조하는 수단이 아니라 국민의 노후자금이라는 원칙을 명확히 하고 장기 수익성과 위험관리를 최우선 기준으로 삼도록 외부 개입을 차단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다음 개혁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다시 조정하는 수준을 넘어 기금운용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며 “모수개혁으로 기금 고갈 시점을 늦췄지만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만큼 1458조원에 달하는 국민 노후자금을 누가, 어떤 원칙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운용할 것인지까지 손보는 것이 국민연금 신뢰 회복의 핵심 과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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