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이 가상자산 거래를 위한 보조 수단을 넘어 결제와 해외송금, 기업 간 정산, 토큰화 자산 거래까지 연결하는 차세대 금융 인프라로 영역을 넓히면서 미국과 유럽 등에선 발빠르게 제도화에 나서고 있는 반면 한국은 입법이 지연되면서 글로벌 디지털금융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카드 수수료·해외송금 비용 낮춘다…‘코인’ 넘어 실생활 금융 인프라로
스테이블코인은 달러나 원화 등 특정 법정통화와 가치가 연동되도록 설계된 디지털자산이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처럼 가격 변동에 따른 투자수익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자산과 달리 일정한 화폐가치를 유지하면서 지급·결제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장 큰 장점은 거래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 카드결제나 해외송금은 은행과 카드사, 지급결제사업자, 청산기관 등 여러 중개기관을 거치는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같은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당사자 간 손쉽게 이전이 가능하다. 스마트계약과 결합하면 특정 조건이 충족됐을 때 대금이 자동 지급되도록 하는 기업 간 정산도 가능하다.
소상공인과 가맹점에는 결제수수료 절감 효과도 기대된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지급카드 이용규모를 토대로 추정한 결과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신용카드 결제를 일부 대체할 경우 연간 비용 절감액은 최소 3700억원에서 최대 5조15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기준 시나리오에서 카드 결제의 10%를 대체하면 약 1조2300억원, 30%를 대체하면 약 3조6800억원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해외송금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크다. 기존 방식은 국내 송금은행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중개은행, 해외 수취은행 등을 거치며 여러 차례 수수료가 발생한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을 통해 직접 이전할 수 있어 국경과 금융기관 영업시간의 제약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
예컨대 200달러(약 26만7600원) 해외송금을 기준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할 경우 0.5~3.0%의 수수료가 발생하는 반면 기존 SWIFT 방식은 평균 6.35% 수준으로 평가됐다. 원화를 스테이블코인으로 바꾸고 현지 통화로 다시 환전하는 비용과 자금세탁방지 규제 준수 비용 등을 추가하고도 기존 방식보다 저렴하게 송금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향후 토큰증권과 실물연계자산(RWA)이 확대될 경우 스테이블코인은 투자자에게도 디지털자산 거래의 결제·정산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도 가격 변동성이 큰 가상자산을 매도한 뒤 법정화폐로 출금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안정된 스테이블코인으로 보유하는 방식이 활용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은 이미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올해 7월 기준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약 3123억달러(약 418조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98.8%를 차지한다. 초기에는 가상자산 거래와 거래소 유동성 관리가 주요 용도였지만 최근에는 해외송금과 개인 간 지급, 기업 간 결제 등 실물경제 영역으로 활용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美는 1대1 준비자산·상환권까지 법제화…韓은 핵심규칙도 논의중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커지는 만큼 미국은 스테이블코인을 금지하기보다 제도 안에서 관리하는 방향을 택했다. 지난해 제정된 지니어스법은 허가받은 사업자만 지급형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고 발행액에 대해 최소 1대1의 준비자산을 보유하도록 했다. 준비자산도 현금과 단기 미 국채 등 고유동성·저위험 자산을 중심으로 구성하도록 규정했다.
이용자가 스테이블코인을 다시 법정화폐로 바꿀 수 있는 상환권과 준비자산 공시 의무도 마련했다. 발행사가 파산할 경우 스테이블코인 보유자의 준비자산에 대한 청구권을 일반채권자보다 우선하도록 해 이용자 보호 장치도 갖췄다. 오는 15일 표결을 앞두고 있는 클래리티법은 여기에 디지털자산의 증권·상품 분류와 SEC·CFTC의 감독 권한, 거래소와 중개업자 규율 등이 더해졌다.
유럽연합도 미카법(MiCA)을 통해 발행자 인가와 준비자산, 자기자본, 상환권 등을 규율하고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스테이블코인은 ‘중요 토큰’으로 지정해 강화된 감독을 적용했다. 미국과 유럽 모두 발행을 허용하되 금융안정과 이용자 보호를 위한 규칙을 먼저 구축한 셈이다.
반면 국내에서는 2023년 제정된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이용자 자산 보호와 불공정거래 규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주체와 준비자산, 상환권 등을 별도로 규율하지 않는다. 올해 7월 기준 스테이블코인 관련 제정안은 9건이 발의됐지만 발행 자격과 인가요건, 준비자산 구성, 이용자 보호, 감독체계 등을 둘러싼 쟁점은 여전히 논의 단계다.
그 사이 국내 기업들의 준비는 빨라지고 있다. 가상자산 거래소와 금융사, 핀테크·플랫폼 기업들은 지급결제와 해외송금, 정산 등에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기 위한 기술 실증과 사업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다만 제도적 기준이 확정되지 않아 실제 발행이나 상용화보다 향후 시장 진입을 위한 인프라 확보 단계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입법 지연이 길어질수록 시장 선점 측면에서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98% 이상이 이미 달러 기반 자산으로 형성된 상황에서 국내 결제·송금 인프라마저 해외 스테이블코인 중심으로 자리 잡을 경우 원화 기반 서비스와 국내 사업자들이 뒤늦게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두영 국회예산정책처 경제분석관은 “미국과 유럽이 제도적 안전장치를 갖춘 채 지급결제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만큼 국내 역시 발행 주체 논쟁에 머무르기보다 준비자산과 상환권, 감독체계 등 핵심 원칙을 조속히 확정해 기업과 이용자가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다만 법제화를 서두르는 과정에서 안전장치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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