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이돌 팬덤에서 대표적인 문제로 지적돼 온 이른바 ‘사생 문화’가 스포츠계로 번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젊은 여성 팬들의 유입으로 관중과 굿즈 소비가 늘어나는 등 프로야구가 새로운 흥행기를 맞고 있지만, 좋아하는 선수의 유니폼이나 포토카드를 구매하는 수준을 넘어 비공개 이동 일정과 항공편 정보까지 돈을 주고 거래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어서다. 단순한 팬심을 넘어 선수의 사생활 침해와 스토킹, 안전사고 등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9일 소셜미디어 엑스(X·구 트위터)에는 ‘윤동희 항공편, 서울-나고야 9월 왕복 예약번호’를 판매한다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해당 계정은 그동안 다수의 아이돌을 대상으로 해외 이동 항공편과 관련 정보를 판매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롯데 자이언츠 소속 외야수 윤동희는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이어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야구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에 발탁됐으며 오는 21일 대만과 첫 경기를 앞두고 있다.
해당 게시글을 접한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아이돌·배우 판에서만 돌던 게 프로야구까지 넘어왔다”, “돌판 악행을 그대로 하고 있다”, “응원을 넘어선 사생활 침해다” 등의 비판이 이어졌다. 일부 팬들은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우 공식 일정에 따라 단체로 이동하는 만큼 출국 시점 등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데도 관련 정보를 돈을 받고 판매하는 행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KBO는 지난달 12일 야구 국가대표팀의 소집 및 출국 일정을 공개했다. 대표팀 선수들은 원 소속 구단에서 13일까지 경기에 출전한 뒤 오는 14일 소집돼 국내에서 훈련과 연습경기를 진행하고 18일 일본으로 출국할 예정이다. 이미 공식적으로 공개된 대표팀 일정에 더해 선수 개인의 항공편과 예약정보까지 별도의 거래 대상으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르데스크가 해당 판매자에게 직접 윤동희 선수의 출국 관련 정보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판매자는 “3.0요”라고 답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제공되는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안내하지 않았다. 이후 SNS를 중심으로 선수 항공편 정보 판매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자 해당 계정 운영자는 계정을 비공개 상태로 전환한 상태다.
프로야구 팬 홍아현 씨(29·여)는 “인기 아이돌이 해외 스케줄을 나갈 때마다 항공편이나 이동 일정이 엑스와 같은 SNS를 통해 공유되고 돈을 받고 판매되는 경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며 “그런 문화가 프로야구 선수들에게까지 퍼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도 사생활 침해나 안전 문제 때문에 비판받는 문화인데 스포츠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며 “선수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것과 비공개 이동정보까지 찾아내 따라가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프로야구의 인기가 높아지고 여성 관람객이 새로운 핵심 팬층으로 자리 잡으면서 야구를 즐기는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한국프로스포츠협회가 실시한 ‘2025 프로스포츠 관람객 성향조사’에 따르면 프로야구 관람객 가운데 여성은 56.7%로 남성(43.3%)보다 13.4%p 높았다. 여성 관람객 비중은 2024년 55.5%에서 지난해 56.7%로 1.2%p 증가했다. 구단별로도 10개 구단 가운데 한화를 제외한 9개 구단에서 여성 관람객 비중이 남성을 웃돌았다.
새로운 팬층의 유입은 프로야구의 응원과 소비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과거 구단과 경기 자체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응원문화에 더해 특정 선수를 ‘최애’로 정하고 유니폼과 포토카드, 인형 등 관련 굿즈를 구매하는 선수 개인 중심의 팬덤 문화가 확산하는 모습이다. 특정 선수의 포토카드를 직접 제작하거나 이른바 대포 카메라로 선수들의 모습을 촬영해 개인 팬페이지를 운영하는 등 연예계에서 익숙했던 팬 활동도 야구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이러한 팬덤 문화의 변화는 프로야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요인으로 평가된다. 선수 개인에 대한 관심이 경기 관람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유니폼과 굿즈 등 관련 소비를 촉진하면서 프로야구의 팬층과 소비시장을 넓히는 데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어서다. 다만 팬들의 관심이 경기와 공식적인 팬 활동을 넘어 선수의 사적인 영역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연예계가 먼저 겪었던 과잉 팬덤의 부작용까지 스포츠계에 유입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부 팬들의 관심이 경기장과 공식적인 팬 활동의 범위를 넘어 선수의 사적인 영역으로 확대될 경우 비공개 일정이나 이동 동선을 알아내기 위한 정보 거래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특히 항공편 등 개인의 이동정보가 불특정 다수에게 거래·확산될 경우 공항이나 숙소에서 선수를 기다리거나 이동 동선을 따라가는 행위로 이어져 사생활 침해와 스토킹, 안전사고 등 2차 피해를 야기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연예인의 항공편 정보를 사고파는 행위는 이미 연예계에서 대표적인 과잉 팬덤의 부작용으로 지적돼 온 사안이다. 일부 사생팬들은 연예인의 출입국 일정과 탑승 항공편 등 비공개 정보를 확보해 SNS나 메신저 등을 통해 공유·판매하고 이를 토대로 같은 항공편을 예약하거나 공항에서 이동 동선을 따라가는 등의 행위를 벌여왔다. 일부 사례에서는 유출된 항공정보가 좌석 변경이나 항공권 예약 취소 등에 악용되면서 연예인의 일정에 차질을 빚는 등 2차 피해로 이어지기도 했다.
지난 2020년에는 일본에서 귀국하던 걸그룹 트와이스 멤버 나연이 해외 스토커와 같은 항공편에 탑승하는 일이 발생했다. 직접적인 신체 피해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후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등 안전에 대한 우려가 불거졌다. BTS 멤버 뷔 역시 과거 팬들과 소통하는 라이브 방송에서 “우리도 전세기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싶다”며 “우리가 타는 걸 알고 옆자리나 앞자리에 앉는 분들이 있다”고 밝히며 일부 팬들의 과도한 접근에 불편함을 호소한 바 있다.
이처럼 항공편 정보 유출로 인한 피해가 반복되자 연예기획사들도 대응에 나섰다. 지난해 BTS 소속사 하이브는 “항공권 정보를 판매·구매하는 행위는 아티스트의 안전을 위협하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명백한 불법 행위”라며 “공항 및 항공기 내 안전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후 전담 대응팀을 꾸리고 관련 계정을 추적하는 한편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지난 2월에는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연예인 수십 명의 항공기 탑승 정보를 빼내 판매한 혐의로 30대 여성을 입건하는 등 실제 수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전문가들 역시 새로운 팬층의 유입과 팬덤 문화의 확산이 프로스포츠 흥행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선수의 사생활과 안전을 침해하는 과도한 팬 활동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과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젊은 여성 팬을 비롯한 새로운 팬층의 유입은 프로야구의 관중 확대와 관련 산업 성장 측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현상이다”며 “다만 연예계에서 나타났던 과도한 팬덤 문화까지 스포츠계로 넘어오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선수의 비공개 일정이나 항공편과 같은 개인정보를 거래하는 행위는 단순한 팬 활동의 범위를 넘어 선수의 사생활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며 “스포츠계 역시 연예계의 선행 사례를 참고해 선수 보호를 위한 정보 관리와 팬 문화에 대한 선제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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