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을 각색해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영화라고 해서 흥행 성적까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최근 10년간 관련 논란이 불거진 작품들을 살펴보면 1000만 관객을 넘어선 영화가 있는 반면 100만명에도 미치지 못한 작품도 있었다. 영화적 상상력이 대중에게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역사 인식과 얼마나 충돌했는지, 개봉 당시 역사·사회적 분위기는 어떠했는지, 여기에 작품 완성도와 장르적 재미까지 더해지면서 흥행 성패가 엇갈린 것으로 나타났다.
1일 르데스크가 관련 작품들의 흥행 성적을 분석한 결과 단순히 ‘역사를 왜곡했느냐’보다 영화가 어떤 역사적 사실을 건드렸는지, 각색된 내용이 대중에게 이미 형성된 역사 인식과 얼마나 충돌했는지에 따라 반응이 달라졌다. 여기에 개봉 당시 역사·사회적 이슈와 극장시장 상황, 경쟁작, 작품 완성도와 장르적 재미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덕혜옹주’와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개봉한 2016년은 박근혜 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 후폭풍과 국정 역사교과서 논란을 동시에 겪으면서 역사 인식과 과거사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한 시기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 친일 문제를 둘러싼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광복절을 앞두고 개봉한 ‘덕혜옹주’는 일제에 의해 삶이 흔들린 마지막 황녀의 비극과 귀향 서사를 전면에 내세우며 약 560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영화는 실제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 덕혜옹주의 독립운동 참여와 연설 등을 담으면서 역사왜곡과 대한제국 황실 미화 논란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영화 속 각색은 대중에게 익숙한 ‘일제강점기 비운의 황녀’라는 인물 이미지와 정면으로 충돌하기보다 이를 극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개인의 비극과 귀향을 중심으로 한 감정적인 서사가 더해지면서 논란 속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반면 한 달 뒤 추석 극장가에 등장한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약 97만명에 그쳤다. 영화는 김정호가 전국을 직접 답사해 대동여지도를 만들고 흥선대원군에게 탄압받는 모습을 그렸지만 일부 설정의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여기에 같은 시기 개봉한 독립운동 소재 영화 ‘밀정’과 경쟁하면서 관객의 관심을 끌어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017년 개봉한 ‘군함도’ 역시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일제강점기 하시마섬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을 소재로 했지만 실제 역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대규모 집단 탈출과 조선인이 같은 조선인을 착취하는 모습 등을 담으면서 강제동원의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럼에도 최종 관객은 약 659만명에 달했다. 다만 200억원대 제작비와 황정민·소지섭·송중기 등 대형 배우진, 개봉 초기 높은 관심을 고려하면 당초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역사왜곡 논란과 흥행 부진이 함께 나타난 대표적인 작품은 2019년 7월 개봉한 ‘나랏말싸미’다. 영화는 세종대왕이 직접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기존 역사 인식과 달리 승려 신미를 한글 창제의 핵심 인물로 묘사했다. 제작진은 여러 한글 창제설 가운데 하나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고 설명했지만 관객들 사이에서는 이를 단순한 영화적 상상력보다 세종의 업적을 훼손하는 역사왜곡으로 받아들이는 반응이 나왔다. 최종 관객 역시 96만명으로 100만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흥행에 실패했다.
영화가 개봉한 2019년은 문재인 정부 집권 3년차이자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해였다. 역사와 민족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았고 같은 해 7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확산하면서 한일 과거사와 역사 인식 문제도 다시 사회 전면에 부상했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의 관심과 민감도가 어느 때보다 높아진 시기였던 셈이다.
반면 같은 해 12월 개봉한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다른 결과를 보였다. 영화 역시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확장하고 세종이 간의대를 파괴하는 등 알려진 역사와 다른 설정을 담아 고증 논란이 제기됐지만 최종 관객은 약 200만명으로 ‘나랏말싸미’의 두 배를 넘어섰다.
두 작품 모두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9년에 개봉했고 역사와 민족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았던 시기에 세종대왕을 주요 인물로 내세웠지만 관객 반응은 달랐다. 차이의 배경 중 하나로 영화적 상상력이 개입한 지점이 꼽힌다. ‘나랏말싸미’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라는 대중에게 확고하게 자리 잡은 역사 인식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면 ‘천문’은 세종과 장영실이 조선의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었다는 기본적인 역사적 틀을 유지한 채 기록이 부족한 두 사람의 관계와 세부 사건에 상상력을 더했다.
역사적 사건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하고도 흥행에 크게 성공한 사례도 있다. 2023년 개봉한 ‘서울의 봄’은 역사적 사건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하고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실제 인물의 이름을 바꾸고 일부 병력 대치와 인물 간 갈등을 극적으로 각색했다. 일부에서는 실제 역사와 다른 세부 묘사를 두고 왜곡이라는 비판도 제기됐지만 영화가 12·12 군사반란이라는 사건의 기본적인 역사 자체를 뒤집었다는 논쟁으로까지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흥행 배경으로는 12·12 군사반란이라는 이미 알려진 근현대사를 정치 스릴러로 재구성한 장르적 접근이 지목된다. 역사적 결말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도 신군부의 권력 장악 과정을 긴장감 있는 대결 구도로 보여주면서 흥미를 유발했고, 역사적 사건을 잘 알지 못했던 젊은 관객층까지 끌어들였다. 여기에 황정민·정우성 등 배우들의 연기와 관객 입소문도 흥행에 힘을 보탰다.
최근에는 지난 23일 개봉한 영화 ‘암살자(들)’이 역사왜곡 논란의 중심에 섰다. 작품은 1974년 8월 15일 발생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당시 사건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특히 극 중 인물들이 당시 정권이나 중앙정보부가 사건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장면이 포함되면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른 가설을 부각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논란이 확산하자 제작진은 공식 입장문을 통해 특정한 정치적 목적이나 의도를 갖고 제작한 작품이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1974년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남아 있는 다양한 기록을 토대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한 극영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역사왜곡 논란이 발생했다고 해서 반드시 흥행 실패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왜곡의 강도는 영화가 역사적 사실의 어느 부분을 바꿨는지, 기존에 형성된 역사 인식과 얼마나 충돌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진각 성신여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관객들은 역사영화에서 모든 장면이 실제 기록과 동일해야 한다고 요구하기보다는 영화적 허구가 어느 지점까지 개입했는지를 본다”며 “대중에게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핵심 역사나 인물의 역할을 뒤집을 경우에는 단순한 각색보다 역사 자체를 바꿨다는 반발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중요한 것은 대중이 영화적 상상력을 정서적으로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느냐다”며 “영화 한 편이 역사를 규정하거나 역사 자체를 왜곡한다고 보는 것은 문화콘텐츠의 역할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다만 국민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다룰 때는 창작 과정에서도 그 지점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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